
나는 원래부터 조용한 아이였다.
작은 일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못했고, 누군가의 말투 하나에도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감정은 깊게 스며들었고, 생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린 나를 두고 말했다.
예민한 아이.
잘 우는 아이.
다루기 어려운 아이라고.
우리 집은 단단했다.
강한 아버지 아래에서 규칙은 분명했고, 삶에는 늘 방향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삶과 나의 삶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그 울타리 밖으로 도망치게 될 거라는 것도.
처음부터 책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일기를 사랑하는 아이였다.
일기장은 유일하게 나를 순화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강한 아버지, 여린 감성의 엄마,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동생들 사이에서 나는 늘 어딘가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사람 같았다.
몸에 남은 화상 흉터와 서툰 대인관계 속에서 나는 점점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밀어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더 단단한 울타리 안에 가두려 했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 이른 나이에 인간의 존재 이유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그 책은 내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열여덟의 나는 그 질문 하나에 사로잡혔다.
‘불행은 세상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나를 찾겠다며 가출을 감행했고, 향한 곳은 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붙잡혀 돌아왔지만, 그 무렵부터 내 장래희망은 작가에서 심리상담가와 교주 사이 어디쯤으로 바뀌어 있었다.
부모님의 간섭은 더 깊어졌고,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세상 사람들과 나는 더 자주 어긋났다. 나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동생처럼 인형 같이 빼어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엄마처럼 여성스럽고 조신하지도 않았다.
평범한 얼굴.
작은 체구.
몸에 남은 흉터.
그게 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참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젊은 작가,
예술하는 아이,
불안한 사람,
사색하는 아이,
새장 속 아이.
혹은,
묘한 아이.
별난 아이.
어른 같은 아이.
책벌레.
그리고 아버지는 늘 강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
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사랑이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조차 통제하려 드는 사람들 인지도 모른다고. 아버지는 늘 내게 강해지길 바랐다. 동생들은 정말 그렇게 자라났다. 단단하고 구김 없이. 그럴수록 나는 더 약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불행은 자꾸 나를 향해 왔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그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고통만큼은 동생들과 나눠 갖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 아이들은 나처럼 흔들리지 않길 바랐다.
아마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체육관을 전전했고, 쓰러질 만큼 운동했다.
하지만 노력은 늘 몸보다 빨랐다.
조금 무리하면 정신을 잃었고, 옷장 한 칸은 어느새 각종 도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교 3등 안에 들어도 나는 자랑이 아니었다.
반면 동생들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집안은 오래 들떠 있었다.
오기가 생겼다. 부모님은 알고 있었다. 나는 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끝내 나는 강해지지 못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점점 스스로를 가족 안의 이방인처럼 느꼈다. 혼자만 방향이 다른 사람처럼.
그 무렵 내 숨구멍이 되어준 사람은 삼촌이었다.
삼촌 역시 아버지처럼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강함을 내게 드러내지 않았다.
운동선수였던 그는 큰 성과 없이 방황했고, 자연스럽게 거친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았다. 어린 내 눈에도 삼촌은 늘 어딘가 떠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삼촌이 사람답다고 느꼈다. 정해진 길 위에서만 살아온 내게 그는 처음 보는 종류의 자유였다. 어느 날 어린 내가 물었다.
“삼촌은 왜 맨날 맞고 와…”
삼촌은 웃었다.
“맞는 게 편해”
“거짓말. 삼촌 약하지?”
“그래. 니가 삼촌 좀 지켜주라”
그 말을 웃으며 했지만, 나는 오래 기억했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나는 처음으로 삼촌이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삼촌 주변 사람들 중 유독 나를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 많던 그는 어느 날 내게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삼촌 친구들은 늘 나를 놀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늦은 밤에도 연락이 왔고, 끝내 집 앞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장면을 삼촌이 보게 되었다. 나는 긴장했다.
삼촌이 금방이라도 달려올 줄 알았다.
그런데 삼촌은 끝까지 담배를 피웠다.
마치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들으려는 사람처럼.
한참 뒤에야 삼촌이 나를 불렀다.
“선혜야.”
그 사람도 동시에 삼촌을 돌아봤다.
놀란 얼굴이었다.
삼촌은 천천히 걸어왔다.
“형님… 여기 있었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삼촌이 말했다.
“덕재야. 쟤는… 안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삼촌은 그 사람을 때렸다.
화내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무서웠다.
나는 다급히 삼촌을 붙잡았다.
“왜 그래, 삼촌.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야.”
“니는 집에 들어가.”
“아니라니까!”
그 짧은 순간, 내 귀에는 다른 말처럼 들렸다.
쟤는 이상해서 안 돼.
쟤는 흉터가 있어서 안 돼.
쟤는 흠이 많아서 안 돼.
나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삼촌은 빠져.”
그제야 삼촌이 나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들고 있던 사람을 바닥에 내던지듯 놓아버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서운 뒷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 사람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삼촌 역시 그 일에 대해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오해한 채로,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에 남자는 오직 삼촌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쓰는 글 속에는 늘 삼촌 같은 사람이 등장했다.
다양한 글을 쓰고 싶었다. 공상과 과학, 그러니까 SF 장르도 꿈꿨다. 과학이 만들어낸 미래와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을 써 내려갈수록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내 관심은 과학보다 인간에게 향해 있었다.
사회와 윤리를 벗어난 인간의 타락, 그리고 결국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것. 그 주제의 글은 놀라울 만큼 막힘없이 써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내 글을 읽었고, 다음 화를 기다렸다.
댓글이 달릴 때마다 잠을 포기한 채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화.
마지막 문장이 올라간 뒤, 한 줄의 댓글이 달렸다.
“근친이네.”
그 짧은 문장은 오랫동안 사랑받던 내 글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어린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사랑에 국적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왜 어떤 사랑은 단번에 금기가 되어버리는 걸까.
오기가 생겼다.
사회적 시선이 아니라, 문학 안에서만큼은 그것 또한 사랑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 사고로 헤어진 두 사람이 모른 채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마지막에서야 조카와 삼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완결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댓글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혹평과는 별개로 조회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들은 금지된 사랑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한다는 것을.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일수록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 무렵부터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근친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알아야 더 깊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알고 싶었다.
내 글 속에 삼촌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가 단지 익숙한 남성이 삼촌뿐이어서인지, 아니면 나조차 모르는 사이 정말 삼촌을 남자로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근친.
무겁고 어려운 단어였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촌 간 결혼이 허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여전히 금기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래전부터 그 금기를 이야기 속에 담아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의 비극,
혹은 누군가는 성서 속 아담과 이브마저 근친의 구조로 해석하기도 했다. 나는 그 금기를 옹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이 왜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조차 사랑과 욕망, 애착과 의존을 혼동하게 되는지 궁금했다.
닮은 사람에게 끌리는 본능.
가장 가까운 대상에게 향하는 원초적인 애착.
그리고 그것을 사회와 윤리 속에서 분리해 가는 과정.
나는 결국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담 선생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삼촌을 좋아하는 건지 헷갈려요.”
선생님은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작게 웃으셨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하면서도 분리되고, 가까우면서도 경계를 지키며, 의지하면서도 독립해 가는 것이 건강한 관계라고.
지나치게 보호적이었던 환경 속에서 정서적 의존과 애착이 조금 뒤섞인 것뿐이라고.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처음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삼촌이라는 사람 자체를 욕망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해 주는 존재에게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젊은 작가라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나를 쉽게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끝내 나를 숨기는 사람이 되었다.
가명을 만들고,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며 철저히 나 자신은 감춘 채 오직 생각과 감정만을 글 속에 남겨두었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에게 들키는 건 두려워하면서도,
내 마음만큼은 누군가 읽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왜 나는 끝내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정말 사랑인 걸까.
단지 다정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뿐이었다면, 살면서 스쳐 지나간 수많은 다정함 속에서도 한 번쯤은 사랑에 빠졌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 주변에는 늘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강한 사람들.
아버지도, 삼촌도, 처음 만난 남자도 그랬고 심지어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조차 하나같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삼촌만이 유일하게 내 앞에서 자신의 강함을 숨겼다.
그래서였을까. 내 글 속에는 언제나 삼촌 같은 사람이 등장했다. 삼촌은 내게 호기심이었다.
어디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하는 사람.
흔들리고, 실패하고, 끝내 삶을 단정 짓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런 모습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움을 느꼈다.
심리학을 공부한 뒤에도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는 역할은 늘 삼촌의 몫이었다. 삼촌은 현실적이면서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가 며칠이고 나를 붙잡아 두었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고를 흔들어 놓곤 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적어도 내가 알던 강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배 뚱뚱이 얼룩말.
개똥멍충이.
우스운 별명을 붙이고 놀릴 수 있을 만큼.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내가 더 포식자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발톱 하나만으로도 얼룩말의 가죽쯤은 벗길 수 있는 존재처럼 자신을 내어준다는 건, 적어도 그는 내게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의 손은 이상할 만큼 보드라웠다. 심지어 나보다 더.
말랑하고, 작고, 미지근한 손.
그렇다고 보호본능을 자극할 만큼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묘함이 있었다.
한 문장으로 정의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나는 누구보다 사람의 심리를 해석하려 애쓰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앞에만 서면 객관성을 잃어버렸다.
사사로운 감정들이 먼저 밀려왔고, 분석은 번번이 무너졌다.
그럴 때면 이상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혹시 나는 정말 이상한 운명을 타고난 건 아닐까 하고.
만지고 싶고, 건드려 보고 싶고, 결국엔 흔들어 놓고 싶은 어떤 기묘한 기운 같은 것. 내 삶에 반복되던 불행들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면, 설명되지 않던 많은 일들이 그제야 이해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역시 나를 그저 만져보고 싶은 대상 정도로 여긴 걸지도 모른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그 대상이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래서 일이 여기까지 커진 걸지도 모른다.
타고난 운명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감정을 탓해야 할까.
수없이 곱씹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늘 하나였다.
그를 사랑하는 나.
그는 나를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사랑도 아닌 것 같고,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 머물렀다.
단순한 동정과 연민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왜.
왜 그는 나를 자신의 삶 바깥으로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아직도 그 사람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게 정말 사랑일까.
아니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감정에 대한 미련과 집착일까.
혹은 나는 아직도, 다정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낯선 존재를 이해하지 못해 그 호기심 속을 헤매고 있는 것뿐일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가 궁금하고 보고 싶다는 것.
아마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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