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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66 내가 가지면 안 될 거 같아요. 돌려드릴게요.


몸에 새겨진 상처들의 이유를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아주 사소한 하나를 바꾸었다. 함께 마시는 술자리에서 더 이상 술을 사러 나가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그가 내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다정함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우리는 종종 네 사람이 우리 집에 모였다. 그의 아내는 늘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남편을 ‘오빠’라 부르며 웃었고,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구김 없이 자란 사람 특유의 밝음이 있었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
나는 늘 부엌에 서 있었고, 그의 아내와 내 남편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그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아마 나를 돕기도, 그렇다고 등을 돌리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배려를 먼저 아는 사람.

아이들을 보내고 곧장 독서모임에 가야 했던 날, 내가 아끼는 베이지색 가방에 책과 노트를 챙겼다. 가방에 달린 하얀 인형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그와 나란히 걸었다.

“독서모임 가면 뭐해요?”
“읽은 책에서 마음에 남은 문장을 필사하고, 그 이야기를 나눠요.”
“재미있어요?”
“네. 같은 책을 읽어도 다 다르게 느끼는 게 좋아요.”

그는 잠시 나를 보다가, 웃음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천상 작가네요.”

그리고 곧,
“조심해요.”

늦었다.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인형이 없어졌어요"

그는 다친 무릎을 보다가, 인형을 찾는 나를 바라봤다.

“지금 인형이 중요해요?”
“나한텐… 이게 더 중요해요.”

잠깐의 정적.
그는 아무 말 없이 인형을 주워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쪽은… 좀 묘해요. 평범하지가 않아요.”
“나요? 저 평범한데요?”
“자기한테는 너무 후하네요.”

나는 대답 대신 입술만 삐죽였다. 무릎은 여전히 아팠고, 손 안의 인형은 따뜻했다.

얼마 뒤, 둘째 아이 소풍날 아침.
밥을 해두고도 취사 버튼을 누르지 않은 걸 알았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다.
결국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쾌히 밥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새벽 다섯 시, 잠옷 차림으로 그의 아파트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밥통을 안고 있는 그가 먼저 내려와 있었다.

“어? 내려오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그거… 형님 잠옷 아니에요?”

감사 인사는 공기 중에 흩어지고, 그의 시선은 내 옷에 머물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밥통을 더 끌어안았다. 도시락을 싸기 위해, 양치와 세수를 한 게 다였으니까.. 속옷을 챙겨 입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아…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커서 바로 알겠네요. 누가 봐도 형님 옷이네.”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근데 형님 이런 잠옷도 입어요?”
“잘 안 입으니까… 제가 입어요.”
“우리 애 잠옷이랑 비슷하네요.”

짧은 웃음.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낯설어요. 그쪽이 그걸 입고 있으니까.”
"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익숙한 모습인데, 낯설다니.

“아니에요. 김밥 싸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맞아요! 밥 감사합니다.”
“바지 내려가겠는데요?”
“이렇게 잡고 가면 돼요.”
“위에 옷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올라가 보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했다.
왜 그는 그 모습을 낯설다고 했을까.
남편 옷을 입고 있어서? 작은 아이와 잠옷이 비슷해서?

단지 잠옷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아닌 어떤 다른 모습이 그 안에 있었던 걸까.

그날 아침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고,
손에 쥔 밥통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식지 않았다.


#예뻐요

버스를 놓칠 때면, 나는 가끔 그의 차를 탄다.
그의 차 안에는 이상한 평온이 있다.
라디오 소리도, 창밖 풍경도 아닌.
그의 손끝에서 나는 작은 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운전할 때마다 그는 늘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사각, 슥—
조용히 스치는 그 소리.
처음엔 별생각 없이 둘이 있는 공간이 어색해서 물었었다.
그게 뭐냐고.
그는 말했다.
담배를 끊고 나서 가장 힘든 순간이
운전할 때라고.
그 시간만큼은 아직도 금단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담배를 피워달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난 사람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마치 내가 들고 다니는 클릭커처럼,
불안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주는 무언가 같았다.

“나… 그거 한번 만져봐도 돼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건넸다.
손에 닿은 순간,
조약돌은 따뜻했다.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매끈했다.
얼마나 오래, 자주 만졌던 걸까.

“예뻐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가질래요?”
"아뇨! 난 가지려고 한 말이 아닌.."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끝내 내 손안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돌려주려던 손을
그가 한 번 더 붙잡았을 때,

"가지세요. 가져도 돼요"

나는 그걸 놓치지 못했다.
그 조약돌은
내 것이 아닌 채로, 내 것이 되어버렸다.
집에서는 꺼내지 못했고,
가방 깊숙이 넣어둔 채
사무실에서만 조심스럽게 꺼냈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하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따라 해보기도 했다.
출근하면 페퍼민트 한 잔과 함께
그걸 손에 올려놓고 굴렸다.
차가운 돌이
천천히 내 온도로 데워질 때마다,
문득
그의 온기가 떠올랐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쉽게 익숙해지고,
루틴처럼 기대어버리는 사람.
그는 내게 평온한 사람이자 동시에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점심 약속이 있던 날,
우리는 모두 한 차에 올랐다.

“오빠, 돌 우쨌노?”

그의 아내의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사무실에.”

아무 일 아닌 듯 흘러갔지만,
나는 그 순간
내가 무언가를 훔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나는 결국 그 조약돌을 다시 가져왔다.
아이들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가지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는 쉽게 말했다.
괜찮다고.
새로운 걸 찾았다고.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손 안의 돌이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천천히 손을 펼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조약돌만 바라보다가
조용히 가져갔다.
그 순간이
왜 그렇게 아쉬웠는지,
나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혹시 그거 알아요?”

그가 꺼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교미 도중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사마귀 이야기.
죽음을 알면서도
그 선택을 한다는 것.

“파멸이네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말했다.
그 쾌감은
목숨을 걸 만큼의 가치가 있었을 거라고.

그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다고,
그저 떠오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손안에 남아 있던
그 따뜻한 감촉과,
결국은
놓아야 했던 것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