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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43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무서운 걸요...?

불안은 늘 그렇게 시작됐다.
어떠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아니라 공백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서.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불안은 질문의 형태로 나를 찾아왔고, 그 질문들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안과 나름 타협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불안을 감추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감춰지지 않다는 건, 불안으로 버겁다는 말일수도 있지만, 내게는 다른 의미다. 타인에게 의지하려는 나약함이다. 나약 해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오늘도 연습하시죠^^"

그가 보는 나는.... 좀 안쓰러운가? 나는 엘리베이터를 여전히 무서워한다. 한번 갇혔던 엘리베이터는 이사를 가기 전까지 못 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

뒤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나를 한걸음 떨어져 보고 있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원래 그러하듯 양손을 앞으로 공손이 모아 손톱 옆 살을 뜯어냈다. 불안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1층입니다>

"가시죠"

먼저 들어가라는 모션을 취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가 먼저 들어가,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등을 입에 물었고, 입속에 들어간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그는 매번 말보다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손을 잡은 설명 따윈 없었다. 예측할 뿐이다. 나의 불안을 낮추기 위한 수단이라는...
나란히 깍지를 껴, 엘리베이터 층수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아직 무서워요?"
"네.."
"엘리베이터는 절대 추락하지 않아요^^"
"알아요. 이론은 아는데... 그냥 무서울 뿐이에요.."
"내가 있잖아요^^"

그는 깍지 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별거 없는 그의 행동에 왜인지 든든해졌다. 누군가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내 손목을 잡아 끄는 법이 없었다. 불안이 높아 무서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그 어떠한 물리적인 힘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눈을 마주쳐 줄 뿐이다. 나의 안위를 살피듯 느긋하고 안정적인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 눈동자에 쉽게 불안이 사그라들고 만다. 속수무책이다.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은 대단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서서 그의 눈동자를 찾아 내 눈에 담으려 했다. 민망함 따위는 없었다. 살고자 함이 우선이었으므로..
그 누군가의 눈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담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성숙한 눈에서 위로받고 있다 착각에 휘둘리고 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니에요^^"

우리 집 층수에 도착했고, 그제서야 그는 깍지를 풀었다.

<문이 닫힙니다>

그가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빠르게 열림 버튼을 눌러, 내 손을 다시 잡아끌어당겼다. 나는 휘청이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고, 그는 휘청이는 나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ㅠㅠㅠㅠ

"연습만이 살 길이에요"

그는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으려한다. 아니, 피하는 건가.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서, 그를 올려다보면.. 그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만 주시한다.

"이렇게 연습해도 혼자는 못 타요...."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죠^^ 괜찮아요^^"

재촉하지 않았고, 귀찮아하지 않는 그의 말투에 조급함은 사라졌다. 또 다른 누군가와는 너무도 달랐다.



갇히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이라는 주황색 불이 들어왔으며 나는 무서웠다.
한 번은 그와 나란히 서 있는데 점검 중이라는 문구를 보고 심장이 쿵하고 멈춰버렸다.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뇨, 안 괜찮아요"
"나랑 타면 괜찮아요"
"못 타겠어요"

문이 열렸고, 그가 먼저 탔다. 그리곤 손목을 잡아 본인 쪽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타지 않으려 버텼지만, 그에게 쉽게 끌려갔다.

<문이 닫힙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꿀렁임도 컸고, 웅 하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무서워ㅜㅠㅠㅠ"
"나 봐요. 진짜 괜찮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갑갑해요. 나 일 가야 하는데 쓰러지면 ...."

그는 내게 가까이, 최대한 가까이 다가왔다.
가깝다는 표현보다는 닿기 직전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쓰러지면 내가 바로 인공호흡 해줄게요^^"

그의 장난스러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그의 배로 꽂혔다. 그는 웃었고, 나는 눈을 흘겼다.

"윽..."

<문이 열립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필시, 아프지 않을 힘으로 배를 때렸지만, 그는 아픈 척 했다.

"이유 불문하고 폭력은 나쁜 거라며 그렇게 얘들한테 교육하시더니... 사람 잡겠네 잡겠어"
"주먹을 좀 더 세게 날릴걸 그랬어요"
"^^"
"오늘은 아주 잘했어요^^"
"네.. 어쨌든, 고마워요.."
"우리, 한번 더 탈까요?"
"아뇨!"
"^^"
"나 놀리니까 재밌죠?"
"그걸 말이라고??^^"

그는 잔뜩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버렸다. 생각보다 그는 더 개구쟁이였고, 그 장난스러움에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있었다. 그 누군가와는 다른 방법으로 불안을 낮추고 있었다. 불안을 낮추는 방법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적당한 거기를 두고 어떠한 것에서도 흔들림 없는 성숙한 눈빛이 좋다. 마음이 거기로 흐른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한다.  그렇게 불안의 시작은 공백에서부터 나를 삼킨다.



#크리스마스이브, 결혼기념일

서른을 6일 남기고 부랴부랴 한 결혼식.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분명, 기념일이었다. 결혼을 한 날이기에.. 그러나 아이들이 생긴 후 그날은 더 이상 기념일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사랑해"

사랑을 말하던 입술은 달콤하지 않고, 무설탕 홍삼 캔디 보다도 썼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기에... 나는 장바구니에 이기지도 못하는 술들을 담았다. 장 보는 시간은 꽤나 슬펐고, 아낌없이 누군가 떠올라버렸다. 비참했다. 이런 일로 슬픔에 쉽게 빠지는 내가 말이다.

"포식자들 볼까? 야생의 새끼들 볼까?"

그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바보.

"오늘은 안 볼래. 노래 들을까?"
"좋아. 최성수 남남? 아니면 문글라스(이화숙) 연인이여?"
"연인이여"

사랑했어요, 연인이여.
오늘 밤엔 내 곁에서 떠나지 말아요.
그리고 말해줘요. 나를 잊지 않겠다고
그냥 이대로 날 안아주세요.

노래가 참 슬펐고, 가사는 더더욱 슬펐다.
연인이여, 연인이여.  
슬픔의 절정을 '연인이여'라는 가사에 실어 듣는 이에게는 구슬프게 들렸다.

그는 그 노래에 절정에 도달했고, 나는 그의 절정 아래에서 구슬피 울었다. 술을 마셨으나 취하지 않았고, 나는 평소보다 더 맑고 또렷했다. 누군가가 그리웠다. 아니,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아니, 누군가에게 가고 싶었다. 느닷없이 떠오르는 누군가가, 그 누군가는 나의 연인이었다.


그렇게 숭고하지 않다던 누군가를 위해,
그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