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무교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3:16)
신의 사랑은 늘 희생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졌듯,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
사랑이라는 말 뒤에 가끔 '구원'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착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연인의 상처에서 비롯된 마음이라면 더더욱...
사랑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기쁨과 행복만이 아니다. 때로는 상실, 슬픔, 후회, 미련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오래 남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으면 그 잔해 속에서 아주 미묘한 빛 하나가 피어오른다. 그 빛의 이름은 연민이다.
<지난날>
나의 부모님은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내에게 시집가길 바라셨다. 그늘 없고, 구김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에...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는 양보와 협상 따위는 없으리라.
그의 부모님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별이 되셨다고 했다. 원인은 사고사였고, 그렇게 그는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도 없이 하늘 아래 고아가 되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울타리를 잃은 셈이다.
<선혜씨, 괜찮아요?>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이유를 물을 것이고, 이유를 대답하기엔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다음 날, 퇴근하는데 사무실 앞에 그가 서 있었다.
"^^"
"응???? 연락도 없이...??"
"선혜 씨가 워낙 부재이시라...^^"
"미안해요ㅠㅠ"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 떡볶이랑 순대 먹으러 갈까요?^^"
"네^^"
우리는 회사 근처 분식점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그는 아빠의 횡포(?)에 대해 묻지 않았고, 나는 먼저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어도 이미 그는 슬픔과 상실이 많은 자였으므로. 저렇게 밝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숨기고 사는지 헤아릴 수 없었으니까. 해서, 나는 처음으로 웃는 얼굴이 상처를 숨기고 사는 슬픈 가면일지도 모른다고 깨닫기도 했다. 그는 꽃을 참 사랑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진 않았으나, 피고 지며 또 피고 지는 이유로 꽃을 좋아하지 않을까 짐작할 뿐.
"그거, 나 주려는거 갖고 온 거 아니에요??^^"
"맞아요. 선혜씨가 주인이죠. 내 꽃들 모두"
"다음에 저도 농원에 데려가주세요^^ 가서 직접 보고 싶어요"
"환영이죠! 꼭 같이 가요^^"
부모님이 하셨다던 그 농원,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끝이 나고 말았다. 마주 앉아 분식을 시키고 나는 그를, 그는 나를 향해 아무 말도 없었다.
"전에는 꽃을 안 좋아했어요.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죠. 부모님 돌아가시고 농원일 하다가 꽃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선혜 씨는 꽃을 왜 좋아하세요?"
"화무십일홍.. 한자성어 들어보셨어요?^^"
"처음 들어봐요"
"꽃 화, 없을 무, 열 십, 날 일, 붉을 홍. 제 아무리 붉게 핀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꽃이 열흘만 붉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이 더 소중한 거죠. 달도 기울어야 다시 차오르듯이요. 그런 이유로 저는 꽃을 좋아해요. 또 뭐 예쁘기도 하고, 향기도 좋아서 좋아하는 것도 있고요^^"
"우와....."
"꽃이 질 때의 쓸쓸함과 허망함에만 머물지 말고, 다음 꽃을 기다린다면 기대와 희망은 있어요. 꽃은 화려하고 수수하게 예쁘기도 하지만, 겸손과 기다림의 지혜가 있거든요. 지금 내가 가진 행복이 영원하다며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또 잃어버린 것과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님을 알고 절망하지 말아요. 한 번은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에요...^^"
"감동받았어요.. 88년생 맞죠? 78이나 68 아니고??^^"
"치.... 나 88 맞아요!"
"알아요. 이렇게 어리게 생겼는데... 어서 드세요. 배고프겠어요"
"네^^ 맛있게 드세요^^"
그는 나의 식성과 먹성을 이기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번번이. 가령, 저렇게 작은 몸으로 저게 다 들어가? 하면서 혀를 내둘렀고, 우리는 경쟁이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분식을 집어 먹었다. 당연히 내가 이겼고, 그의 젓가락질은 현저히 느려졌다.
"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는데 철학을 얘기하시니...."
"그게 왜요??"
"어리신 게 분명히 맞는데 꼭 누나 같아서요ㅎ"
"압.... 저 늙어 보여요?ㅡㅡ"
"아뇨 아뇨, 전혀요!"
한 여름의 저녁은 습하고 무더웠다. 한 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그를 배웅코자 그의 차를 향해 걸었지만, 그는 내 차를 향해 걸었다.
"선혜 씨 집 앞까지 같이 갈래요^^"
"차는 어쩌고요?"
"좀 걷죠 뭐..^^"
"우리 집에서 여기까지요? 안 돼요! 너무 덥고 습해요. 여기서 헤어져요"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캄캄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축축이 들렸다. 분홍색 스파크 차에 그를 태웠다.
"출발하시죠??^^"
"네 출발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귀가하지 않는, 다 큰 딸을 항상 부모님은 걱정하셨다. 벨소리가 울렸고, 엄마임을 알았다. 나는 벨소리가 울리지 않게 했다.
"걱정하시겠다. 신경 쓰지 말고 받아요"
"아뇨. 곧 집에 가면 볼 텐데요..^^"
"^^;; 선혜 씨 나 어때요?"
"좋아요. 다정하시고.. 말도 잘 통하고요^^"
"나이가 많은 데도요? 가진 게 많이 부족한데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좋으면 좋은 거지...^^"
"선혜 씨 어머니랑 저, 8살 차이 나요"
"^^;; 엄마가 많이 젊은 편이에요. 고등학생인 엄마한테 반해서 우스갯소리로 엄마를 훔쳐왔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엄마가 젊은것도, **씨가 나이가 많은 것도 큰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 나도 선혜 씨 훔쳐갈까요?^^"
"아뇨. 안 돼요. 그랬다간 아빠 화만 돋을 뿐이에요"
"아버님도 어머님 훔치셨는데 나라고 선혜씨 못 훔칠까 봐요?"
"아빠 일은... 미안해요"
"선혜 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예상은 했었어요. 나이가 많아서 싫다죠?"
"^^;;;"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본인이 나이가 많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는 그런 이유에서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셨다. 아빠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러했다.
"돈이 없는 건, 아빠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그늘이 있는 건 아빠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부모 중에 한쪽만 잃어도 티가 나는데 둘 다 없는 거는 살면서 그게 언제고 니 발목을 잡는다. 그게 니 탓이 아닌데 가까운 사람한테 화살이 날아가. 부족한 사랑을 니 사랑으로 채워갈 거라는 택도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접어라"
"그 사람 그늘 없어. 밝아. 사랑 많이 받은 나보다 훨씬 밝아!"
"그 밝음 뒤에 숨은, 그늘을 못 본 거야. 니가"
"왜 아빠 마음대로 판단해. 다 그러지 않잖아. 저 사람은 다를 수 있잖아"
"꼴랑 4~5번 만나고 이러는데 더 오래 만났다가는 아주 집을 나가시겠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돼. 접어"
"싫어 내가 왜!!!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선보라 해서 선봤고, 중매 보라고 해서 중매 봤어. 이 사람이랑 결혼 못하면 혼자 늙어 죽을 거야. 엄마 아빠 보란 듯이!!!"
"그래, 차라리 엄마 아빠랑 평생 같이 살자. 니가 불행해서 질질 짜는 것보다 우리 셋이 같이 사는 게 낫다"
"왜 내가 불행해질 거라 생각하는데!!!!! 왜!!!!!!!"
"니는 강하지 못해. 안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굳이 안 좋은 걸 일부러 끌어안고 살려는 네가 아빠 눈에는 안 봐도 선하다. 나는 죽어도 내 딸이 희생하고 불행해지는 꼴은 못 봐"
"그렇게 안 살게. 그러면 되잖아. 나 이제 그만 팔려가고 싶어. 겉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괜찮은 척하는 거 이제 역겨워서 못하겠어"
"아빠가 여태 너한테 져주고 살았어. 그런데 이번엔 어림없다. 온몸에 기름 두르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꼴, 아빠가 우찌 보노!"
"나 집 나갈 거야!!!!!"
"나가면 두 번 다시 들어올 수 없어"
"나보고 어쩌라고!!!!!"
"그놈이 어디가 그리 좋데? 그 멸치 같은 놈이"
"아빠!!!!!!"
"대체 어디에 빠진 거냐고. 말해. 아빠가 전국팔도를 뒤져서라도 똑같은 놈으로 니 앞에 데려올 테니까. 뭐가 마음에 드는데. 말해!"
"난 막무가내로 강한 아빠가 싫어. 진짜 미워"
"나도 이렇게 나약한 딸은 싫어!!!"
".... 맨날 나보고 나약하데!!!!!!!!!!! 나 나약하지 않아!!!"
"세상물정 모르는, 복에 겨워 호강에 빠진 가쑤나. 그냥 곱게 있다 시집이나 잘 가면 될 것을. 뭐 한다 사서 고생을 할라 그라노"
"그 사람이 다정해서 좋아. 아빠처럼 이렇게 강하지도 않고, 나한테 강요하지도 않아"
"그놈의 책이 사람을 다 버려놨지? 맨날천날 책만 읽으니까 뜬구름만 잡지! 내가 이놈의 책 모조리 다 불태워버릴 거야"
"그러기만 해!!! 죽을 거야. 죽어버릴 거야!!!!!!"
어리고 철없는 나는 아빠에게 상처될만한 말들을 골라 뱉었고, 젊은 아빠는 강한 만큼 나를 새집 안으로 몰아넣으셨다. 새집 안으로 몰아넣는 아빠도, 새집으로 기어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도 둘 다 치명상이었다.
해서, 그에게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뒤로 사무실 앞에 기다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마칠 때 쯔음, 창밖을 보면 어김없이 그가 서 있었다. 그를 향해 계단을 급히 내려가면 그는 나를 보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키가 큰 그는 쪼그라앉아 내 종아릴 끌어 안은채 나를 높이 안아 들었다. 그렇게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무진장 덥고 습했지만, 그때만큼은 더위도 잊을 만큼 낭만이 우리 사이를 감싸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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