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쓸한 메리 크리스마스.
"나 이제 말 잘하죠?"
"네^^"
말수가 많아진 듯한 그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말주변이 없다던 그는, 날이 갈수록 봇물 터지듯 내게 살아온 얘기, 사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로.. 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마냥 천진하게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느냐고들 한다만, 그의 이야기는 어느 베스트셀러보다 흥미 있는 스토리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게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사리 들려준다는 건, 그에게 내가 조금은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여지없이 행복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오직 그와 함께하는 모든 것이 좋았다. 함께하는 순간, 날씨, 냄새, 바람, 계절... 뭐 하나 거창하고 근사한 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들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했다. 그와 함께한 내 하루는 어느 때보다 근사했고, 죄다 거창했다.
어깨를 나란히 두고 함께 동물을 보고, 그의 눈썹과 코를 만져보는 그 평범한 하루. 나는 '그'만 있으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궁금했다.
'내가 과연 그에게 행운일까? 행복이었을까?'
같은 마음일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 나는 쉽게 쥐고 버려질 패는 아니었으면 바랐다. 그렇게 나가리나 파투는 나고 싶지 않았음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기엔 나는 그를 참 많이도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유치원 때 영재소리 들었어요^^"
어디까지 과거로 가실 건데요..ㅎㅎ
유치원 시절의 그는 꽤 영민했고, 똘똘했나 보다. 바보,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네. 그가 지나왔던 모든 과거가 궁금해져 괜스레 질투가 나기도 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전으로 갔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내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그 앞에 알짱거릴 것이다. 그의 마음에 대차게 한번 걸릴 때까지. 기필코 말이다.
"일할 때 말 한마디도 안 한적도 있었어요. 그 정도로 말수가 적어요"
그가 들려주는 무해한 이야기들 속에 나는 빠르게 평온을 찾아들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오해했었다. 나와도 만나는 데, 다른 작가들과도 만나고 있을 거라는 확신. 그러나 그의 한마디에 모든 오해는 물거품이 되어 일순간 사라졌다. 진짜 내가 처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안심과 평온. 잔머리에 능하고, 연민한 꾀돌이가 아닌, 진정으로 담백한 인물임을 알아버렸다.
조곤조곤하며 나긋 거리는 음성을 모조리 앗아오고 싶었다. 내게만 들려주기를 바랐다. 못난 마음은 하루에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들락거렸다. 그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이와 나눠갖는 건 퍽 싫었고, 내 것이 아님에 분통했다. 분명 아닌데, 점점 내 것을 빼앗긴 피해자 코스프레처럼 억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랬다가는... 못난 마음을 보고선, 줄행랑으로 도망갈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또 숨겨야 했다. 그는 내게 점점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고, 나는 나를 꽁꽁 더 숨겨야 했다. 꽤나 슬픈 현실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알아버리기엔, 그는 퍽 괜찮은 인물이어서 적당한 거리는 필요했다. 서로를 구원코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나는 그를 사랑하며 물러서야 함을 뼈저리게 알았다.
그런 말이 있다. '꽃은 지더라도 향기를 간직한다'라고..
떨어진 꽃잎 하나에도 향이 담겨있고, 마른 꽃대에도 향기가 남아있다. 어느 향기든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다. 각자의 꽃들이 가진 꽃말과 남아있는 추억으로 저마다 다른 이유로 금방 시들어버릴 꽃을 좋아하지 싶다. 지금도 피어있는 싱그러운 꽃들도 언젠가는 시들어버릴 결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오늘이 가장 젊고 아름다운 누군가를 떠올린다. 누구는 지나간 젊었던 시절에게, 누구는 사랑하는 이에게.
'금방 시들었다'한들, 향을 잃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향이 내일로, 또 내일로 퍼져 나가길. 해서, 그에게 닿길 바란다. 나는 그에게 금방이라도 시들어버릴 꽃임을 잘 안다. 더 화려하게 필수록 추잡하고 지저분해질 것도. 결코 그에게 꺾이지 않을 꽃이라는 걸 알지만, 활짝 피는 거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는 꽃밭이라도 되겠습니다'
이다지도,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 내내.
한 점 후회 없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으로 그를 대할 것이다.
주여, 이토록 하찮은 제게 왜 무거운 사랑을 주신겁니까. 단 한 번도, 주께 사랑 달라 기도드린 바 없사온데 왜 그러신 겁니까. 단지, 사랑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죠..
덕분에 사랑을 배웠습니다. 너로 해서.
메리크리스마스 앞에 메리가 아닌, 쓸쓸한으로 할래요.
쓸쓸한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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