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터 그를 좋아한 거지?'
문득 던져진 나의 물음에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덩이처럼 커질 대로 커진 마음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쓴 소설 속에서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은 늘 강력했고 임팩트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나만 예외인 건지.
연애를 책으로만 배운 웹소설 작가의 미스터리 사랑이야기.
그럼에도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며 꾸역꾸역 그와의 지난 과거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그의 직업은 웹소설 편집자다.
연애 한번 안 해본 내가 글을 계속 쓰고 있는 이유,
그를 보기 위해서이다.
회사에서는 그를 "과장님"이라 부른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내 나름 꿈꾸던 상상 속 로맨스를 글로 쓴 게 출판사에 발탁되었고, 그걸 계기로 지금 같이 일하고 있다. 사실 작가에게는 출근이라는 개념이 없다. 글 써서 보내기만 하면 될 일. 그렇지만 나는 출근을 한다.
그를 보기 위해서.
처음 시작은 나를 위한 채찍질로 일주일에 한 번 출근을 결심했지만, 지금은 오롯이 그를 보기 위해 출근을 한다.
작년 겨울 때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쓴 원고지를 챙겨 출근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이른 출근시간에 차 대신 걷기로 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고, 내 귀를 타고 '터보의 always'가 흘러 들어온다. 쌀쌀한 겨울바람이지만 상쾌하고 기분 좋다. 이대로 출근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조금 더 여유를 즐기고 싶어 집 앞 강 건너 공원으로 갔다. 겨울을 견디고 있는 풍경들이 꽤나 쓸쓸해 보였고, 이내 푸릇푸릇한 싱그러움도 보고 싶어 대나무 산책길로 들어섰다. 들어선 순간, 돌아서 나왔어야 했다. 내 코를 찌르는 연거푸 뿜어 나오는 담배 연기.
겨울의 찬바람을 뚫고 담배의 진한 냄새는 내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검은 옷을 입은 6명의 남자. 검은 롱패딩에 무릎 기장까지 오는 검은 반바지 차림의 앳된 남자들이 대나무 산책길에서 담배를 태워대고 있다. 운동선수들인가? 귀에서 들려오는 노래 너머로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불안이 덮쳐왔고, 이미 쏟아진 시선을 의식하고 뒤돌아가기엔 늦은 듯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노랫소리에 들리지 않은 척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고 순간 놀라 얼어붙었다. 이내 용기 내어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귀에서 버즈를 빼며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그중 한 명이 물었고,
"9시 40분이네요." 핸드폰 액정을 보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시간을 물었 던 어린 남자는 폰을 빼앗아가 버렸다. 불길한 기분, 나의 불안은 순식간에 나를 삼켜버렸다.
"우린 추운데 엄청 따뜻하게 입었네? 니 옷 좀 벗어주라"
그중 한 명이 내뱉은 말에 다섯 명의 어린 남자들은 자기네들끼리 깔깔거리며 웃는다. 절대, 절대 추워 보이지 않았다. 롱패딩을 열어젖힌 모습에 추운 것보다 오히려 더워 보였다.
마음 같아선 '이건 정말 나쁜 행동이야.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고 자책하지 말고 그만해!'라고 해주고 싶지만 마음과 다르게 나온 말은
"저요?"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그들끼리 서로 보며 웃는다.
"벗으라고"
"저 어디 가는 길이라서 안 돼요. 제 폰 돌려주세요"
"싫은데?"
어째서 6명 중에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하나 없을까. 앞으로의 우리 사회는 괜찮을까.
"옷 벗으면 폰 줄게"
스산하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두 뺨을 지나간다.
그동안 썼던 나의 웹소설이 저 폰 안에 그대로 있다. 폰을 두고 갈 순 없는 일. 유연하게 대처를 못할 만큼 공포로 휩싸여 결국은 연두색 뽀글뽀글 점퍼를 벗었다.
점퍼 속에는 하필 가장 좋아하는, 맨살에 닿는 그 촉감과 부드러움이 좋은 얇디얇은 회색 니트 상의를 입고 있었다. 흰 브래지어가 조금은 비치는 듯했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어린 남자한테 이런 꼴을 보이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잠바 말고, 바지 벗어라고. 우리 다 반바지잖아."
또 뭐가 그리 웃기는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의 말에 자동적으로 청바지에 손이 갔다. 문득 바지를 벗는다고 이 상황이 끝날까 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단정 지어졌다.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는데 폰 뺏어서 도망갈까? 그게 가능할까? 만약에 뛰다가 잡히면? 더 험한 꼴이겠지? 바지를 벗으려는 데 아버지 말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은 없다.'
"저기... 돈 줄 테니깐 바지 사서 입으실래요?"
나의 지혜로운(?) 생각에 감탄했다.
"오~~~~" 합창이라도 하 듯 야유가 들려왔다.
"니 쫌 사는 가베? 현금 아니면 벗고"
아버지 말이 통했다. 나는 늘 현금을 들고 다닌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아버지가 현금을 들고 다니라고 한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 것 같다.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49만 5천 원을 꺼냈다. 며칠 전 시장에서 약과 사 먹고 남은 현금의 전부였다. 그제야 온몸을 덮쳤던 공포가 조금 풀리는 듯했고 돈을 주고서야 외투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핸드폰은 신고할지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저만치 바닥에 두고 가기로..
그렇게 49만 5천 원을 어린 학생들에게 옷 사 입으라고 용돈을 쥐어주고서야 상황이 끝이 났다.
신고를 할까도 싶었지만, 그들보다 내가 어른이었기에 그리고 어린 남자에게 돈을 준 창피함에 덮기로 했다.
10시에 편집자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10시다. 한달음에 회사로 달려갔다.
"잘 지내셨어요?"
과장님의 따뜻한 인사말에 아까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다 풀림과 동시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의 눈물은 나에 대한 한심함과 무력감 그리고 이 나이 먹도록 나하나도 지킬 힘이나 지혜로움이 없다는 허탈감이었다.
"아파서 우는 거 아니죠?"
티슈를 내게 건네주며 그가 물었다.
금방 있었던 해프닝과는 사뭇 다른 따뜻함과 배려에 '어른 남자'의 여유와 부드러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실내가 따뜻해서 인지, 과장님의 배려가 따뜻해서 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한 위로는 충분히 받은 시간이었다.
그때 과장님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물었더라면 뿌엥 하고 울면서 어린아이처럼 있었던 일을 쏟아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묻질 않았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계기로 내가 그를 향한 마음이 시작된 걸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이후였을까?
어쩐지 오늘도 그를 사랑하게 된 시작을 알 수 없다.
어쩌면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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