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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 #1-1 태워줄게요


"1층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하다 이내 곧 기분 좋은 냄새에 아쉬웠던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고 발걸음이 가볍다. 건물을 벗어날수록 코를 자극하는 진한 향기. 딱 비 오기 직전에만 풍기는 비를 잔뜩 품고 있는 흙냄새와 풀냄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거 같은 먹구름과 습기 찬 냄새.
모든 게 완벽하다.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과 완벽한 날을 그냥 흘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인심 썼다!
오늘은 날씨에 내 사랑을 걸어본다.
횡단보도 건너기 전, 3방울의 비를 맞으면 다시 돌아가서 그를 한번 더 보고 오리라.

'비야 제발 내려라. 비야 내려라. 비야 내려줘'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마다 간절히 바라본다.



"어? 진짜 비다!"

간절한 내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비가 내린다. 아니 비를 딱 3방울만 나에게 내려줬다.
그를 한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원하는 바였으면 날씨에 내기를 걸지 않고 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를 다시 보러 건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마치 전쟁터로 가는 군인만큼이나 비장할까. 아주 잠시 그냥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건 도박에 하늘마저 내 편에 섰으니 이번만큼은 꼭 우산을 핑계로 그를 한번 더 보기로 굳게 결심했다.
엘리베이터로 다시 돌아와 닫힘 버튼과 함께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숨을 참는다.

"문이 닫힙니다."

우산 하나 빌리는데 이렇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던가. 속으로 수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 속에서 내 두 눈은 그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냈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연습해 온 말은 공중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를 다시 봐서 마냥 반가웠다. 불과 헤어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밖에 비 와요. 우산 빌려주세요."

이 날 이 한 문장이 3년 치 용기를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말에 동분서주 분주하게 우산을 찾는 그.
하지만 망했다.
내 큰 용기와 맞바꾼 그의 우산인데 정작 우산이 없다.
티는 안 냈지만 실망이 컸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처음에는 그를 한번 더 볼 수 있음에 좋았는데, 이제는 그의 우산까지 챙겨가겠다는 욕심.
그가 차키를 들고 나에게로 성큼성큼 한달음에 다가왔다. 차에 우산이 하나 있는 거 같다며..

우린 그렇게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2층, 문이 닫힙니다."

문이 닫히기 전 숨을 참으려는데 그가 말을 건다. 숨을 참으려던 타이밍을 놓쳤고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만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쉬지 못한다. 불안이 온몸을 덮쳤고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폐쇄공포증까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말에 자존심에 주먹 쥔 손에 온 힘이 실렸다.

"문이 열립니다."

열리자마자 튕겨나가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몸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드디어 그의 말이 귀에 들린다.

"타세요. 데려다 줄게요"

엘리베이터에서의 긴장과 불안은 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사라져 녹아내렸고, 대신에 아까와는 또 다른 긴장과 설렘으로 나를 채우기 시작했다.

"차가 높죠?"

그와 있을 때 나던 그의 냄새가 차 안 가득 그의 향기로 남아 묻어 있었다. 차 안에 타는 순간, 향기가 내 몸을 휘감고 있는, 마치 그의 향기가 날 안아주는 기분.
날씨마저 내 편임이 틀림없다. 비 오기 전의 습한 날씨는 그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나에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의 사적인 공간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큰 자극적이었고, 흥분된 일이었다.

"바쁘지 않으세요?"

그렇게 그의 향기에 취해 있는 나를 태운 차는 출발했다.
우산만 빌려줘도 분명 만족해하며 집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은 배려에 나의 사심은 쓰나미처럼 요동쳤다.
그리고 운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움직임이 없던 와이퍼.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건 이제 내 알바가 아니다.
내 옆엔 그가 있으니.
쿵쾅거리는 내 심장소리가 커서 집까지 오는 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대신 차에서 나눈 대화에서 그와 마주쳤던 그의 눈은 아주 정확하게 기억한다.
선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눈매를 가진 그.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순한 눈빛의 눈동자는 환공포증 있는 나를 그에게서부터 경계를 풀기에 충분했고, 몸에 베인 배려는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에게서부터 경계가 풀리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향기가 가득한 그의 차 안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내면의 목소리.

'그의 살냄새가 맡고 싶다.'

이 생각이 온몸을 덮친 순간, 나의 시선 끝에는 그의 목덜미에 머물게 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야 했다. 의식적으로라도 생각을 떨치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지 않으면 실수를 할 만큼 참기 힘든 본능의 힘은 대단했다. 나와는 반대로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고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거기서 묘한 감정이 또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나와 같지 않은 상대에 마음에 대한 원망이었으리라.
말랑말랑한 상태로 밀폐된 차 안에 있는 그와 나.
나는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면바지를 입은 그가 액셀러레이트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허벅지 근육의 움직임이 무척 섹시하다고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차를 멈추고 그에게 가고 싶었다. 자동차 핸들에게 처음 느껴본 질투.
차 안에서 내 본능을 숨길 공간도 많지 않음을 느낄 때쯤,


응? 도착????
벌써 도착했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려야 했고, 내려야만 한다.
입에서 계속 맴도는 말에 핑계와 명분을 찾지 못했고, 결국은 끝내 내뱉어지지 못했던 말.

'조금만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요?'

그럴 용기는 없었지만, 설사했더라도 그는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게 나였든 내가 아니었든 간에  분명 그는 응했을 것이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럴 거 같다. 배려심 깊고 싫은 소리 못할 거 같은 그는 누구든지 그래줬을게 분명하다.
빌어먹을.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내리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붙잡을 이유를 결국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그의 사적인 공간에서 나는 퇴출되고 말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그와의 사적인 시간, 5분.
그걸로 나는 만족해야 했다.




내리기 전에 진심을 전했다면 달라졌을까.
그와 같이 잠시 있고 싶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거절이었을 게 분명하다.
내가 보는 그는 그랬으니까. 부드러운 듯 단호한 면도 분명 있어 보였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진심을 아직 그에게는 전하지 못하였고 그에게서 대답 또한 듣지 못했으니 아직은 나의 일방적인 사랑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마음을 전하는 일은 이번 생에는 없을 듯싶다. 없어야 한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쌍방도 아닌 일방적인 사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