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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75 내가 당신을 버린 거예요


"편집장님..."
"네"
"이것 좀 꺼내주세요. 키가 작아서 손이 안 닿아요...."
"^^"


그는 손을 직선으로 곧게 펴지 않고도 수월하게 닿았다. 민망했다. 나는 한참을 콩콩 뛰어 끄집어내려 해도 손이 닿을랑 말랑했기에 말이다. 소심한 나는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지 않아 꽤 고민을 해야 했다. 꺼내달라고 말하기 창피했으니까. 효자손이 있었으면 그를 부르지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짧은 가을은 저물어 가고 있었기에..
내게 내미는 손에는 다정함이, 그의 얼굴에는 무해한 웃음이 물들어있었다.

내게 올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무리해 가며.. 내게 왔다. 이러니 내 쪽에서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온통 낭만과 다정을 주면서, 사랑을 주지 않으니 그는 분명 나를 말라죽일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와중에도 그는 내게 왔고, 해서 나는  그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 중에 속해있는 듯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으며, 설렘은 자꾸만 나를 간지럽혔다. 못난 마음이었다.
무르익은 가을에도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멋있었다. 조금은 긴 듯한 머리카락과 뽀글함이 줄어든, 차분한 머리. 성숙해 보였다. 그리고 순한 인상을 한층 더 순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앞머리까지. 어디 다녀오신 길이 었던 건지, 마치고 어디 약속이 있으신 건지 꾸밈 정도와 옷차림이 꽤나 멋스러웠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나는 물을 수 없었다. 별 의미 없이 솔직하게 답변할 그로 인해 질투에 화르르 불타오르면 나만 난감하기에..
그의 모습은 내가 그리던 어른 남자의 표본이었다. 그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한 나의 이상이었다.

"안 추워요??"
"네, 더워요^^"


공적인 만남을 끝내고 사무실 언니와 간단히 브런치를 즐겼다. 언니를 만나 즐거웠던 탓인지, 그가 내게 오고 있어 행복했던 탓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얼굴까지 붉히며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씹던 빵을 삼켜버렸다. 오물오물 먹으면서 전화받기는 싫었으므로...

<여보세요>
<5분 있다 도착할 거 같아요>
<네, 나가 있을게요>
<네>


전화를 끊고 엄청난 속도로 다 먹지 못한 빵을 포크로 콕콕 찍어 입에 쑤셔 넣었다.

"이러려면 밥을 두 번 먹지 그래....??"
"빵은 밥이 아니잖아"
"근데 니 어디 가는데? 나는?"
"언니는 알아서 회사 들어가. 농땡이 피우지 말고"
"그 농땡이 니랑 피웠는데?"
"난 몰라. 언니 나 갈게~ 빠빠이~~"
"진짜 가게?"
"어!!!"

나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손을 흔들었지만, 눈은 언니를 향하지 않았다. 그가 보였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랑이 제어되지 않은 채, 차에 올랐다.
포근한 그의 향기가 나를 감쌌고, 그의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담았다. 함부로 고백해버리고 싶었다.
무진장 사랑하고 있다고....

"잘 지내셨어요?^^"
"네^^"


짧은 인사였지만, 그 작은 대화의 숨결 속에서 나는 괜히 심장이 일렁거렸다.

"편집장님, 식사하셨어요??"
"아뇨, 배고파요..^^"
"저도요...^^"


"편집장님, 엘리베이터 안전하겠죠?"
"네. 안전합니다"


그가 내게 건넨 말 한마디에 마음이 금세 진정 되는 내가 스스로 가여워지는 순간이었다. 가히 그런 내 모습이 가소로웠다. 마주 앉았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행복'이라는 감정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다만 웃고 있을 뿐인데, 나는 그 웃음을 오래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흘러가는 인연이었기에 외로운 나의 창문을 두드려 그 마음에 살포시 안기고 싶었다. 나를 오래 설레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가 내 곁에 머문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닿아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와 나의 마음이 교차하며 지속되는 순간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답다.
그는 내게 너무 따뜻해서.. 바로 그 온도 때문에 더 그리웠다. 평범한 식사였을 뿐인데, 내게는 특별했다. 그에게도 내가 특별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젓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음식들은 그가 어설프게 집어 내 앞접시와 밥그릇에 작은 배려를 올려줄 때마다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서툰 내 젓가락질이 웃긴 건지, 자꾸만 예쁘게 웃는 통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해한 식사 시간이 또 있을까. 식성과 먹성이 좋은 나는 내 입에 넣기 바빴고, 그는 내 밥그릇과 앞접시에 올려주기 바빴다.  그는 배가 고팠고, 나는 간단히 브런치를 먹고 왔던 터였다. 필시 그런 나를 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마 결코 모를 것이 하나 있다. 적게 먹으려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잘 보이고 싶어, 덜 먹으려 애썼거든... 마음을 숨겼지만, 그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형은 도련님, 나는 머슴이었어요^^"

그 말에 괜스레 뿔이 났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낮춰 말하다니.. 머슴이라니... 그런 이름이 그에게 결코 어울리 없다.

'내게 오실래요? 내게 오시면 머슴이 뭐예요, 왕이 될 수 있어요.. 내게 오세요. 내게 와요'

별똥별이 스쳐 가듯, 어둠 속에 가르는 그 떨림은,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우주의 맥박 같은 것이다. 그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거대한 공명의 바다를 유영했다.

그를 '편집장님'이라 부르며 거리를 둬야 하는 사실도, 그가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 더 멀어지는 호흡도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은 순간만이라도 조금 더 가까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싶었다. 이를테면, 그에게는 '오빠'라고 부르고, 그의 입에서는 나를 향한 존대가 아닌 반말 하나 떨어지기를 어린아이처럼 바라기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근황 이야기가 이토록 재미있는 건,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암흑에 갇힌 우주의 그물망에 나는 얹혀있다. 빛이 반사되어 비출 때 비로소 암흑의 별은 선명한 위치를 드러낸다. '그'라는 별이 나를 비출 때, 나는 조금 더 선명한 나로 깨어난다. 숨어있던 나의 존재를 밝혀주는 우주의 반사광처럼 말이다.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에 나는, 충분히 반짝반짝 빛이 났음이다.

그와 마주 앉아, 식사하는 동안.
우리의 어깨 위로 수없이 별이 쏟아져 내렸고, 꽃잎이 바람처럼 흩날렸다. 바람이 부는 휘파람이 거칠어 보여, 나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안던 순간, 나의 마음은 그에게 기울었다. 가을의 축복 속에 그리움이 잉태되어 조용히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떨고 있었다. 가을이 저무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일인지 몰랐으니까.. 그와의 시간이 서서히 저물 것만 같아 숨조차 눌리는 듯했다.

어느새 가을은 저만치 물러나 뒷모습을 보이고, 낙엽은 마지막 춤을 추듯 바람에 슬픔을 맡겼다. 내 마음도 조금씩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그 짧은 몸부림마저 끝내 스러지고 말았다.

그는 해산물을 먹지 않았고, 나는 바나나를 즐기지 않았다.
콘치즈를 퍼먹는 그와 모든 음식을 잘 먹는 나.
미끄덩 거리는 식감을 싫어하고 비린 것을 싫어한다 했다.
서로 다른 취향이었지만, 모든 것이 무해하고 사랑스러웠다.

"어렸을 때 엄마한테 많이 맞았겠어요....^^;;;"
"저, 어머니를 닮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의 귀여움이 어머니에게서 왔다니...^^  문득, 그의 어머니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자리에 계시든, 나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것보다 그를 그렇게 유순하고 다정하게 만든 분들은 얼마나 따스하실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어린 내가 그의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분명히 나를 예뻐해 주셨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꽤나 좋아하는 면들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 복스럽게 잘 먹고, 잘 웃고, 친절하며, 애살이 많다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겠다는 고객님들이 꽤 있었다. 젊은 그와 조금 어린 나.  그리고 부모님, 서로 각각 안 어울리는 듯해 보이지만 함께하는 시간들이 온통 로망이었을 거다. 함께 산에 올라 포대에 쑥을 캐고, 같이 장을 보러 가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그 모든 시간들이 행복일 것이다. 그 모든 상상은 꿈처럼 잠깐 빛나고 현실 앞에서 사그라든다. 나의 모든 자산을 털어, 타임머신 개발에 이바지해야 되나.. 하며 심히 고민까지 해본다.
순식간에 나를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지만, 현실로 돌아왔을 시 아스팔트에 고꾸라져 버린다. 스스로 손과 옷을 탈탈 털며 일어나야 한다. 아프지만 티를 낼 수 없고,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다. 내가 하는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참아내는  짝사랑이다.


굽 높은 부츠를 신고 있었음에도
그의 곁에 서니,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거울 앞에 나란히 비친 우리 둘의 모습은
어쩐지 꽤나 잘 어울렸다.
둘 다 맨발이었다는 사실마저
내 마음을 더 설레게 했다.

그와 머물던 내내
그가 사랑한다 말하던 누군가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그의 온 마음이 나에게로 기울어 있는 듯해,
설렘과 죄스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가늘게 떨며 가슴에 내려앉았다.

짝사랑이란 이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조용하고도 은근한 희망이 그의 옆에서 나도 모르게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버렸지만, 내가 버림받은 듯 아팠고,
그는 버려졌지만, 그가 나를 버린 듯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부재로 나는 말라죽어갔고,
선홍빛 핏물만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