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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74 잠시였던 우리의 계절



"편집장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만약에요, 만약에 편집장님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기 전에, 나를 먼저 만났다면 우리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


그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저렇게 뜸을 들일까. 함께 하기 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으며, 웃고 있던 입모양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가 운전 중이었으니...

"만나지 않았을까요?"

그 한마디가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때는 작가님이 나를 안 좋아할 수도...."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그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봤다. 그는 30대 초반, 나는 20대 초반. 내가 한창 대학생 때 그는 사회인이었을 테지. 한참 활기 넘치는 대학생 때 늙은 그가 성에 차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는 알지 못했다. 내가 활기찬 대학생활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차라리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철저한 관리가 있을 때가 더 편했었다. 자유분방한 대학 시절은 내게 불안 그 자체였다. 죄다 어른인 척, 센척하는 또래들 속에서 나는 필시 그를 만나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딴따라였어도, 한량이었어도, 날라리 불량 성인이었어도.. 내게만 다정하다면  필시 나는 사랑에 빠졌을게다. 말했지 않았던가. 나 얼굴 본다고... 지금보다 젊었을 그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졸졸 그의 뒤만 따라다녔을게다. 분명하다.
나이가 제법 많은 그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딴따라에 한량이라 싫어하셨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와 기필코 결혼하고 말겠지. 기필코 말이다. 그런데 아마 싫어하시진 않으실 거 같다. 내가 사랑하는 첫 남자이니까. 그가 나의 첫 남자가 되겠지.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을까...

"많이 싸웠으려나??"

나... 쫌 드세보이나....? 앙칼져 보이나?? 그의 눈에 비친 나는 드센 여자인가? 설마.. 나를 싸움닭으로 보시는 건 아니겠지? 굳이 이분법으로 따지고 들자면, 손해 보더라도 크게 일을 벌이지 않고 좋게 넘어가려는 쪽에 서있다. 조금 불리하거나 무서우면 아빠 뒤에 숨는 편인데.. 나를 싸움닭으로 생각하시면 그건 분명 오해인데... 아니면 그가 불량 성인이어서 그런 건가... 나한테 많이 혼났으려나..? 하늘이 두쪽이나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일이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상상은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고, 이 쓸데없는 걱정도 내게 모두 행복이다.

"전 편집장님과는 다르게 조용한 편이었고, 책만 읽었어요. 이렇게 변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이유를 묻는 그에게.. 눈이 마주친 그에게,

'당신 때문이에요'라고 말할 뻔했다. 조용히 살고자 한 내가 이렇게 변한 건 모두 그 때문이었으니까. 온 마음과 온몸이 그에게로만 쏠리고 있으니까. 혹여 그가 내게 오겠다 하시면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해야 했으므로.

"편집장님, 눈썹 만져봐도 돼요?"
"네^^"


보드랍지 않았다. 전혀.
까슬까슬 거리고 뾰족했다. 웃겼다.
수없이 그의 눈썹을 만지는 상상을 했었지만, 눈썹이 까슬거릴 거라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다정한 모습에 당연히 눈썹도 보들보들할 거라 지레 짐작했었다. 내 마음대로.
눈썹을 정리하고 자른다는 그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보다 더 관리하시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는 10년 전에 눈썹 정리한 게 다였으니까... 살짝 민망했다. 관리하시기에 잘생김을 유지하는 건가 하며 말이다.

그가 이렇게 다정다감한 연유를 비로소 마지막에 알아냈다.
비행청소년에, 많이 놀아봤으니, 나이가 든 그는 이제야 개과천선한 것이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할 그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또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휘어지고 그 틈엔 주름을 만들어냈다.
다양한 경험과 아르바이트. 또 다양하게 놀아본 그를 나는 동경한다. 나는 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는 그 경험들을 그 시절 낭만이라 우겼고, 나는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겼다. 지금의 흔들림 없는 굳건한 모습은 지난 과거에 대한 연륜이었다. 나는 지금의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란히 누워 그의 지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내게는 그것만이 낭만의 전부이니까.. 그러나 나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경험 자체가 없었고, 그것이 그에게 어리숙해 보일 것이 분명하기에 들려줄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책만 읽고 일기만 쓰고 글만 썼으니..

'온실 속의 화초'는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말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다. 사랑 많이 받고 자라 이타적이고 긍정적이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원래 본성이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성격이 아니라, 원래 성격이 긍정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보살핌과 보호 속에 자라 그렇게 될 수 밖이 없는 나를 비꼬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제서야 그 말이 더 싫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나는 경험들이 없다. 내가 겁쟁이에 쫄보인 이유는 실패를 해본 적이 없어, 다시 일어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넘어지기 전에 나를 일으켜 세웠고, 넘어지려 하면 넘어지는 쪽에 쿠션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통에 그럴 경험이 없었다. 그것이 중년이 된 나의 큰 단점이자, 약점이다.

그런 나를, 그가 알아버리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려나.... 분명, 다른 사람처럼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불쌍하다 생각하겠지.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데.. 지금은 온실 속 화초처럼 살고 있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면 변명이라 하겠지..

"땀 흘리며 운동해야겠어요"

그는 운동을 다짐했고, 나는 그의 변한 모습을 볼 수 없음에 아팠다.
그와 함께한 가을의 낙엽은 온통 붉은빛으로
내게서 하염없이 붉은 낙엽만 떨어졌다.
마음에서 붉은 눈물이 흘렀고, 몸에서는 붉은 낙엽이 물들어갔다.
아팠고 아팠으며 단풍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그를 버린 것이었으나, 그의 부재에 나는 산산조각 났으며 꽤 오래 아팠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되지 못하고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