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세요^^천천히 꼭꼭 씹어드세요. 늙으면 소화기능도 떨어지더라고요>
<완전히 늙은이 취급이군요.. 작가님이랑 연락하면서 먹으니까 혼밥 같지 않고 좋네요^^>
당신의 하루가 무해하고 무탈하기를, 하여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나는 여전히, 가느다란 몸 마디마디 마지막 온 힘을 다해 흔들리는 당신을 계속 붙잡고 있지만요..
당신의 온기를 잊고 싶지 않아 시간의 부름에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찬바람에 툭ㅡ
떨어지고 말 운명이에요.
가을은 물러나고 겨울은 오고 있으니까요.
별 수 없죠, 뭐...
당신을 좋아하고 단어의 뜻을 다시 알게 된 말들이 꽤 많았어요. 수두룩 빽빽했죠.
사랑, 그리움, 헛된 희망, 비극, 이별이 내게 그랬어요.
그동안 나는 꽤 많은 책을 읽었고, 나름 똑똑하다 자부하며 살았어요. 수없이 손끝에서 나온 문장들로 사랑을 만들기도 했기에, 사실 속으론 사랑하게 되면 완전 연애 고수가 될 줄 알았다니깐요...
사랑이 이렇게 무겁고 슬플지 몰랐고요, 그리움이 그토록 지독한지 몰랐어요. 헛된 희망이 나를 갉아먹고 있음을 아는데도, 버릴 줄을 몰랐고요, 비극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도 계속 나아갔어요.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별은, 참으로 나는 어렵습니다. 사랑을 멈출 방법을 모르기도 하고요, 멈출 이유가 없거나 멈추기 싫은 나의 마음은 늘 고심하고 고뇌합니다.
"잘 지냈어요??^^"
허구한 날 하는 그의 진부한 안부인사는 언제쯤 지겨워질까. 지겨워지는 날이 있기는 할까. 내게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냄새가 그득한 그의 차에 올라탔고, 그는 내게 웃었다.
그의 맨투맨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이너 티셔츠와 톤다운 된 바지 색상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계절을 실감했다. 가을 절정에서 보는 그의 외모는... 여전히 수려했다. 미간이 살짝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표정과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에게서 오전 일정이 바빴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탬이 된 건 아닌지... 괜스레 미안했다. 그럼에도 그가 내 옆에 있음에 나는 벅차올랐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는 길을 몰라 내비게이션을 켰고,
나는 그에게 가는 길을 몰라 헤맸다.
그럼에도 그는 잘 찾지 못했다.
바보..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필시 그는 손이 많이 가고 덤벙대고 어리광 심한 막내임이 틀림없었다.
"전 집돌이예요. 잘 안 나가요"
"집에서 뭐 하세요? 취미 생활해요?"
"아뇨... 게임하고, 누워있고.. 집에서 할 게 많아요^^;;"
"아...^^;;;;;;;;"
이런...
그런 그의 모습이 그러졌고, 나는 웃음 났다.
그와 같이 하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았다. 그러고 싶었다.
그와 나란히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게임에 몰두할 모습이 상상이 갔다. 함께하는 게 게임일지라도, 그와 함께라면 그것은 분명, 내게는 낭만일 것이다. 그럴 게지. 그에게는 낭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종류의 게임이든 그를 무조건 이길 것이 뻔하다. 게임을 안 한 지 오래돼서 처음엔 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에 밤을 새워서라도 그를 이기려 들것이다. 내가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너무 잘 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기에... 나는 사랑하는 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없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은 항상 내 것이어야만 하기에....ㅎ 아마 그도 승부욕이 강하다면 우리는 몇 날 며칠을 밤을 지새울게 뻔하다. 아니지? 그는 늙었으니 밤을 지새울 일은 없을게다. 늙은 똥멍청이.
그리고 나는 그와 함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상당히 흡족했다. 잠이 없는 나와 잠이 많은 그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자고 있을 그를 이곳저곳을 몰래 만져볼 내가 너무도 빤했다. 눈썹은 어떤 느낌일지, 속눈썹은 보드라울지, 코는.. 실리콘인지.. 아랫입술이 더 부드러울까 아니면 윗입술이 더 부드러울까.. 하며 말이다. 그러다 나와 놀아주지 않고 오래 자는 그가 미워, 일부러 그를 밟고 지나갈지도 모를 내가 마냥 웃겼다. 그렇게 그는 나의 상상 속에서 뒹굴거리고 또 뒹굴거리며 자고 또 잤다. 그와 함께 한다면 나는 과연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을까..
'당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잠들면 꿈에 나와주실래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를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숨 쉬듯 나온다.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매일 같이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 많이 애정한다고, 많이 애정하고 있다고.. 이 마음은 절대 변질되지 않은 채 무해한 사랑으로 남을 거라고 막.. 함부로 고백해버리고 싶다. 나는 당신의 운전하는 옆모습만 보아도 떨리던 마음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오늘은 키가 크시네요?^^"
"네^^;;;"
치... 키 작다고 놀렸다 이거지? 나한테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 이거야. 그는 늙었고, 나는 그보단 어리니깐..
우리는 음침하고 호러스러운 식당에 도착했다. 검은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괜찮아요??????"
환공포증이 있는 나는 예상치 못한 고양이 눈에 무척 놀랐고, 그는 따스히 내 안위를 물어보았다. 그의 친근한 물음에 은근히 좋았다. 조금 더 내숭을 떨어볼걸.. 그랬더라면 내게 친근한 시선으로 더 머물었겠지, 하며 그날을 후회한다. 그러나 내게 내숭은... 밥을 한 그릇 먹는 거 말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연애를 해볼걸, 진즉에 내숭을 좀 떨어볼걸.. 에라이, 염병할.
그는 전복 내장을 먹지 않았고,
문어 대가리도 먹지 않았다.
늙은 이는, 초딩 입맛이었다.
그렇다고 나도 썩 어른스럽지는 못했다.
콩을 먹지 않았고, 말린 대추를 먹지 않았다.
나는 늙은 그보다 좀 더 성숙한 중딩 입맛이었다.
연신 엉터리 젓가락질로 내게 생선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주었고, 나는 그가 주는 반찬을 입에 가득 넣고 웃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데이트 같던 시간을 방해한 건, 다름 아닌 개자식이었다.
이 개자식은 내가 그를 만나는 날에는 특히 더 전화를 해댔다. 썅. 그가 오해할 까봐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땐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나와 같이 식사를 하려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그는 끝끝내 알지 못했고, 나는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여자로 낙인 되었다. 조금은 억울했다.
"어떻게 하는 거지...??"
"왜 안되지..??"
"편집장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죠??^^;;;"
내가 보는 그는 매사 서툴렀고,
그런 모습마저 낭만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났지만 말이다.
"손이 많이 거긴요~ 10년 전만 해도 이런 첨단기술은 아니었어요^^"
그때는 몰랐다. 말갛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마냥 따라 웃는 게 다였으니.. 그러나 그의 말을 곱씹어보며 알았다. 10년 전에는 필시 그에게 사랑하는 이가 있었을 터였다. 그랬다. 그는 내게 무의식 중에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고백해 버린 격이었다. 그동안 그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화가 났다.
사적인 작가는 처음이라 말하는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고, 그는 바람둥이였다. 날 향한 마음이 결단코 사랑일리가 없는, 동경과 연민도 과분했다. 난 그저 그에게 '장난'에 불과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동안의 말과 행동이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알아야 했으나 내쪽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불쑥불쑥 올라오는 못난 마음을 다스릴 줄을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사랑했던 마음을 죽이고 싶었다. 더 이상을 그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와 증오할 이유가 충만했다. 그럼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내가 정말이지, 정말로 싫다. 사랑은 온통 구원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나를 구원하지 않았다. 사랑은 도덕이 아니며, 사랑은 선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추한 모습이 된다. 자기 연민, 질투, 비참함, 오만, 질척임, 두려움. 사랑은 절대 선이 될 수 없다. 사랑은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고, 그 정직함은 항상 잔혹하다.
사랑은 나를 버렸고, 나를 구하지 않았다.
그 후로 오전 일정을 모두 미루고, 그가 볼지도 모르는 그 길목에 멈췄다. 더 잘 보이게.. 더 잘 볼 수밖에 없게, 색상이 화려한 운동복을 입고 말이다. 그러나 연락은 하지 못했다. 더 구차하긴 싫었으니까.
고민과 고뇌의 시간은 길어졌고, 나는 추웠다. 하여, 그 뒷날부터는 더 짧고, 얇게 입고 나갔다. 추워서 멈추지 않고 그 길목을 지나치길 바라며.. 그럼에도 멈추는 나는 진짜 답이 없음을 알았다. 그에게 연락을 했다. 홧김이었다. 연락이 바로 오면 '진짜 나빠!!!!!!!'라고 해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바빴고, 연락은 한참 뒤였다. 이맘때면 출간되는 책이 많아 편집할 것이 많아 혼밥 먹는 그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그를 향해 뻗은 손톱을 숨겨야 했다. 고단할 그가 눈에 선했으므로. 사랑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 내게만 불평등한 사랑, 이제는 증오한다. 나는 신보다 더 나쁜 것이 사랑이라 생각한다. 신은 인간을 한 번만 죽이지만, 사랑은 인간을 여러 번 죽이니까.. 잔인하고 잔혹한 사랑을 경멸한다.
"연락하면서 먹으니까 혼밥 같지 않고 좋네요^^"
'좋네요'라는 문장에 그만 마음에 살랑바람이 불었고, 벨도 없이 웃고 말았다. 똥멍청이는 그가 아니라 나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사랑은 이렇게 매일 조금씩, 소리 없이, 천천히 나를 죽여갔다.
<저랑 이야기하는 거 맞으시죠?>
아무리 얇은 옷을 입어도 그 길목에서 발걸음이 딱 멈추고 말았다.
젠장할. 날이 따뜻했다. 오래 머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해서, 연락을 했다. 묻지도 않았거만, 사무실에 없다고 친절히도 알려주었다. 못난 마음은 그제야 고개를 쳐들었고, 나는 그에게 곱게 묻기로 했다. 따져 묻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으므로.
<편집장님,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왜용?^^ 궁금한 거 있으세요?>
<있는데요... 답을 들어도, 답을 듣지 않아도 결과가 같을 거 같네요>
하기사, 묻는다 한 들 순순히 대답해 줄 리 만무하다 판단했다.
'저 같은 작가가 전에는 있었나 봐요???'라고 물을 시, '있었어요'라고 답할 리 없을 테니까. 또, 내게 들킨 것이 썩 탐탁지 않아, 나를 멀리하실 수도 있으니 묻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더없이 나는 찌질했다. 그를 보지 않고선 살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빌어먹을, 썅.
제일 중요한 건, 그가 자코모 카사노바처럼 희대의 바람둥이라도 나는 그를 아직은 사랑하기에...
나는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나를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몸짓, 결코 서두르지 않고 나를 살피는 다정함. 태어나 처음 느끼는, 경이롭고 충만한 사랑이 나를 꽉 채웠다. 처음 하는 사랑이 다정한 사내라서 행복하고 행복했으며 또 행복할 것이다. 하필이면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은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저 '어른남자', '키다리아저씨'로 남아있길 바라는 건, 더없고 덧없는 내 욕심이었다. 이제 증오하게 된 사랑이지만, 그에게는 나의 영원한 사랑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날이 밝으면 많이 추울 모양이다. 그의 허벅지에 올라, 그의 목에 코를 박고, 그의 살냄새 맡으면 잠이올까. 그의 이름을 부르다 잠들면 내 꿈에 나와줄까....
사랑은 이렇듯 나를 또 살게 하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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