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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56 가을, 아직 보내지 못한 메세지


가을은 이상하다.
조용한데 마음은 유난히 시끄럽다.
창밖의 바람은 느릿하게 흘러가고,
책상 위에는 여전히 흩어진 원고지와
누군가 사기당한 연필 한 자루가 놓여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암막커튼 속, 휴대폰 불빛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오지 않는 메시지 창을 오래 바라보다
결국 화면을 껐다.

하루 온종일 그 사람 생각을 하면서도
단 한 줄의 말도 건네지 못한 내가 미웠다.
이불을 걷어차고 운동복을 꺼내 입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달리다,
그가 있을 출판사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멈춰 섰다.
연락할까 말까, 그 짧은 망설임 속에
한 계절의 시간이 스며들었다.

"편집장님"

그 짧은 네 글자가
이토록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달릴 때는 몰랐는데,
멈춰 서니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바스락 거림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네~ 작가님^^"

가을의 공기엔 이상하게
그 사람의 이름이 섞여 있다.

"창 밖을 한번 보실래요?"

나는 용기를 냈다.
그 한 문장은 심장이 떨리던 만큼의 용기였다.
나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작아서 안보일지도 모르기에.

"저 지금 일 있어서 외출 나와있어요.."

허공을 흔들던 내 손이
조용히 아래로 떨어졌다.

"아... 네"

풀이 죽었다.
작은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거기 계신 거예요?"
"달리다가.. 멈춰 서서 손 흔들고 있었어요^^"
"못 봐서 아쉽네요^^"

그는 웃었다.
만나도 웃고, 글 속에서도 웃었다.

'사실은 날 보여주러 온 게 아니라,
당신이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 말을 썼다가,
다시 지웠다.
보내지 않은 문장만이
가장 진심에 가까운 법이다.
그에게는 늘 전송되지 않을 말들이 난무했다.

가을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솔직해질수록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건 아직 남은 마음이 사랑이라서 일까
아니면 미련이라서 일까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언제 시간 괜찮을 때 식사 같이해요^^"
"네, 좋아요^^"

그 대화가 오가던 오전,
바람이 차가워지고 거리의 나뭇잎이 붉게 변할 때쯤
그제야 마음도 계절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해 전 가을,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찾아갔고,
의미 없는 이야기를 길게 나눴다.
사실은 당신을 보고 싶어서였다.

햇살은 부드럽고, 공기는 투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늘 서늘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모든 계절에는 끝이 있다는 걸.
길가의 낙엽이 바스락거릴 때면
그때의 대화가 들리는 것 같고,
바람이 스칠 때면
당신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 계절의 공기와 냄새를
그리워하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가을이 오면 당신이 더 그립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질 때면
마음이 세차게 흔들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당신이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며
나는 또 그 길에 멈출 것이다.

손을 흔들며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하고 있는 나를
가을의 바람이 대신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비가 한차례 내리더니 날씨가 추워졌어요. 안부를 여쭙고 싶으나 당신께 닿을 길이 없네요. 그래도 연필을 들어하고 싶은 말을 써내려 갑니다. 이미 많이 쌓여있는 편지들과 또다시 쌓여갈 편지들이 한가득이지만 닿을 수 없는 편지를 적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사랑은 끝이 없고, 내 미련도 끝이 없으니까요.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어요. 환절기에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별일 없는지.. 사뭇 걱정이 되었어요. 당신은 늙었으니까^^ 사실 날씨는 핑계입니다. 쌀쌀해진 날씨에 당신 안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작정 당신이 생각나서 무작정 당신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마음에 당신의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그런 마음에 편지를 쓰는 겁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혹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지, 다른 작가들이 괴롭히지는 않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당신의 비염이 으레 당신의 안녕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합니다. 여러모로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니까요.

다행히 당신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요. 안심했어요.
당신의 무탈함에 이토록 내가 기쁠 수도 있군요^^
기특합니다!ㅎ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사람이 나예요. 웃기죠? 이래 봬도 세드엔딩 윕소설 작가랍니다. 하지만 아픈 사랑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해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해야 하는지 아픔의 이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사랑 때문에 핑계조차도 댈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아픈 사랑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하고 그 사랑은 결단코 당신이어야만 해요. 죽도록 아픈 사랑을 할 거라면 내게 고통을 주는 이가 당신이어야만 해요. 내가 유일하게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니까요.

나를 향하는 당신의 다정한 걱정이 나는 참 좋습니다.

마치 사랑받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계속 아파야 할 거 같잖아요.. 내가 말했죠?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너무 집중해서 들어주는 당신 탓에 세상 모든 걱정과 고민을 당신에게 털어놓을 뻔했다고요.. 나는 그런 당신의 진중한 다정함이 참 좋아요. 그런데요.. '다정함'만 좋은 게 아니에요. 내게 당신 말고도 다정한 사람 몇 있긴 한데요, 그 다정함은 싫더라고요.. 나는 그냥 당신이 이유불문하고 좋은가 봐요^^

잠을 자지 못했어요. 하루 3시간은 잤었는데, 그 마저도 내게는 버거운 일인가 봅니다. 도움을 주는 약을 먹긴 싫었어요.
당신은 그런 나를 걱정했어요. 생각한 거리를 줄여서 뛰라는 당신 말을 온순하게 듣는 내가 웃겼어요.  언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순종적이었을까요.

비가 잡혀있어요.
창밖을 보고 있을 당신을 향해
나는 또 손 흔들고 서 있을 테죠.
안 봐도 뻔해요.

매 순간 안온함으로 가득하길 바라요.
잘 자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