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30일
그의 눈빛이 닿는 순간마다,
가슴 한쪽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의 사랑이라는 이름이 오기 직전의 숨결.
그건 늘 짧고, 늘 불안하게 아름다웠을 것이리라.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열 시까지 온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팩소주 하나와 청포도 사탕을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빨대로 마실까, 잔에 부어 마실까.’
작은 고민 끝에 사탕을 먼저 입안에 넣었다.
달았다.
빨대를 힘껏 꽂고 미지근한 소주를 길게 들이켰다.
싸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을 서서히 태워내려갔다.
곧이어 사탕의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조용한 방 안에서 그 단맛이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달았던가.’
처음 사탕을 입에 넣을 때 맛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속 살이 사탕에 조금 거칠어질 즈음,
그 단맛을 잊지 않으려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알코올의 쓴맛이 사탕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사탕 맛에 집중하다 보니,
팩소주는 어느새 가볍게 비워져 있었다.
조금은 뿌듯했다.
청포도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틀었다.
나도 모르게 오래된 버릇이자 습관이었다.
그 자세에서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랐다.
책을 펼치려다 말고,
그 사람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였다.
결국 사탕을 뱉어버리고 양치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온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조금 어지러웠다.
아직 술이 늘지 않았다.
그게 웃겼다.
한쪽 볼에 밀어둔 사탕을 혀끝으로 굴려 앞으로 데려왔다.
뱉으려던 순간,
그 사탕 하나에 또 그 사람이 스며들었다.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뱉어낼 수 없었다.
그 사탕이 뭐라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어질러진 애정하는 원고지,
누군가 사기당한 연필,
깎이다 만 연필과 당근 모양 지우개,
그리고 내 마음의 잔재.
그 무질서한 풍경 속에서
몸이 천천히 뜨거워졌다.
마치, 그리움이 다시 피어오르는 밤처럼.
그건 취기가 아니었다.
아직 남은 누군가의 잔향이 내게 머물러있었다.
사탕과 그 사람을 조용히 떠올렸다.
그 사람의 부재를 견디는 법 따위는 애초에 몰랐다.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갔다.
감각은 점점 둔해졌고, 생각은 점점 노골적으로 번졌다.
그 사람은 여전히 그리움 속에만 있었고,
나는 그 부재를 핑계 삼아 스스로를 더 저급하게 만들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왜 인지 반갑지 않았다.
"오빠 술 안 마셨어?"
"응. 마시지 말라며"
"잘했어"
그가 불을 켰고, 나의 얼굴 보았다.
"너 술 마셨어?"
"응 조금"
"왜?"
"글이 안 써져서.."
"많이 마셨나 보네. 꿀물 타줄까?"
"많이 안 마셨어"
"혀도 꼬이고 눈도 풀렸는데?"
"그래?"
"응. 볼도 빨개^^ 씻고 올게"
"응~~"
"오빠, 우리 동물의 왕국 볼래?"
"또????? 그럼 사자 편은 안 봐"
"그럼 호랑이 볼까??"
"것도 너무 많이 봤잖아..ㅠ"
"그럼 코모도 편 볼까?"
"그러자 ㅎㅎ 너 많이 취했어 ㅎㅎㅎ"
그는 다리를 벌렸고, 나는 그 사이로 들어가
그의 등을 벽삼아 기대어 동물의 왕국을 봤다.
나는 취했고, 그는 맨 정신이었다.
나는 테레비에 집중했고, 그는 계속 꼼지락 거렸다.
"오빠, 재미없지?"
"아니?? 사자보다 재미있어"
"거짓말"
그는 땡콩 정도의 데미지로 나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내 몸을 돌려 마주 보게 한 다음, 그는 양반을 개고
내 눈에 맞춰 몸을 낮추며 물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단단히 취한 거야?"
"많이는 취하지 않았어"
"아니야. 많이 취했어^^"
"나 술 늘었나 봐^^"
"으이고 자랑이다"
"자랑이지!!!"
"쉿!"
"나 양치하고 올게"
"안 해도 돼"
그는 내게 당겨왔고, 나는 그를 쳐다봤다.
내 앞에 있는 그는 내게 다정하다.
그러나 그 다정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의 눈빛이 닿는 순간,
가슴 한쪽이 조용히 흔들렸다.
설렘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러나 곧 떨어졌다.
"사랑해"
그 말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신호탄이었다.
그의 혀는 뜨거웠고, 취기에 나도 덩달아 뜨거웠다.
"왜 젖어있어..?"
"하고 싶어서"
젖은 몸이 이유에서 인지, 대답이 이유에서 인지..
포개어 앉아있던 그의 몸은 내게 고개를 들었다.
"오빠, 오늘은 다 벗고 할래"
입술을 내게 맞추고 나의 옷을 모조리 벗겨냈다.
그리고 그도 빠르게 벗었다.
그의 다리 위에 포개어 있던 나를 안고
그대로 일어났다.
나를 침대에 눕혔고, 가슴을 입에 물었다.
그의 입안은 뜨거웠다.
예민해져 있던 몸이 좀 더 예민해졌다.
손등을 입에 넣었다.
"소리 내도 돼"
그의 입은 내 입속으로, 그의 손가락은 이미 예민해져 있던
곳에서 움직였다. 미끌거렸고, 그 덕에 그의 숨소리를 더 뜨거웠고 낮았다. 손가락은 더 깊은 곳을 집요하게 들어왔다.
"아파..."
유난히 아팠다.
술에 취하지 않은 그는 여느 때보다 부드러웠지만,
그게 나를 더 유난히 아프게 했다.
"오빠 내가 위에 갈래"
그는 내게서 내려왔고,
나는 그의 위에 올라갔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를 잡은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팠다. 여기저기가 다 아팠다.
마음도 아팠다.
빨리 끝내야 했다.
그의 위에서 뒤를 돌았고,
나는 그의 다리를 잡고 움직였다.
금방 끝이 났다.
선택이 없는 끝맺음이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금방 흘러내릴 것이기에..
내게 머물지 않을 테니까.
내가 품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품고는 있지만 내게는 없는 사람이고,
만지고 싶다고 만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 사람은 현실에 살지 않는다.
나의 그리움 속에만 존재하니까.
그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나를 옭아매지만,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도 그리움이다.

#가을비의 숨결
당신의 마음에 한 번 된통 오래도록 기억되어 보겠다며 부단히도 알짱거렸던 시절이 있었어요. 당신은 나보다 다방면으로 월등했어요. 내가 갖지 못한 여유와 성숙함도 가졌고요, 성실함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친근함도, 말주변은 없었으나 말 한마디도 상냥함과 배려가 있었어요. 게다가 행복해 보였어요. 내가 보기엔 성공적인 삶을 사는 듯한 당신을 동경하고 보고 배우면 가닿지는 못하더라도 언저리쯤 기웃거릴 거라 기대했어요. 그렇게 당신을 연구했어요. 관찰했고요. 당신의 걸음걸이를 눈에 담았고요, 당신의 말투를 익혔어요. 당신의 웃는 얼굴과 날 보는 당신의 눈을 담았어요. 일부러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할 때면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귀에 담았어요.
그러다 당신을 제외하곤 전부 느리게 지나쳤어요.
사랑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무척이나 많이요.
당신의 행복을 빌었어요.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매 순간 행운이 잇따르기를 바랐어요.
몰래한 사랑이지만, 그 사랑은 나를 꽤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있어, 나는 백 번 넘어져도 백한 번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사랑이 가진 힘은 대단했어요. 비스듬히 서서 당신이 날 향해 웃는 모습을 상상하면 없던 힘도 생겼어요.
나 또한 당신의 삶에 그러한 존재이기를 꿈꾸게 되었어요.
당신도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하면서도 염치없는 꿈말이에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바라는 게 늘어갔어요.
결국.. 나도, 당신의 사랑을 바라게 되었어요.
가을비는 쓸쓸함이 아니라 젖은 마음 위로 가을이 남긴 고요하고 다정한 숨결이에요.
내게만 특별히 잘해준 것 없는 그 배려와 친절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가령, 기약 없는 '언제 밥 한번 먹어요'라는 먼 인사치레를 미련하게 믿고 또 기다렸어요.
'언제 한번 봐요. 비 좋아하잖아요'
비가 내렸어요.
가을비가 아침부터 내리니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산을 받쳐 들고나갔더니 가슴에 차가운 기운만 들어찼어요. 가을에 비가 내리니, 쓸쓸하고 처량한 노랫소리처럼 빗방울이 떨어졌어요. 빗물이 얼룩진 마음을 씻겨주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처럼 허접하고 허전하기만 했어요.
나를 왜 자꾸 기다리게 만드시나요.
알아요.
당신의 연락이 추석 인사의 답례였다는 걸요.
그런데요, 나는 그 답례가 없어질 때까지 해주길 바라고 있었나 봐요. 기대했나 봐요. 비가 내렸으니, 아마 더했을 거예요.
'비 올 때 한번 봐요, 비 좋아하잖아요'
맞아요.
곱씹어봐도 기다리라 한 적 없으셨고요, 연락한다 한 적 없으셨어요. 왜 나는 자꾸 별 의미 없는 말에 의미를 담아 스스로 상처받을까요. 나 꽤, 자기 방어가 강한 사람이에요. 상처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말이죠.
'여기 있으면 저쪽이 생각나고, 저쪽에 있으면 이쪽이 마음에 걸리니.. '
우리, 같은 계절을 걷고 있을지도 몰라요.
언젠가 그 계절의 끝에서 만나면요,
나는 당신께 말할 거예요.
잘못된 게 아니라, 너무 깊었다고요.
가을은 또 그렇게 지나갈 거라고요.
그러니, 나를 사랑해 줘요.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요!
사랑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뭐.. 사랑하는 증거를 대라고 하겠어요??
사랑한다고 날 데려가라 하겠어요???
그냥 사랑만 하라고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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