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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42 비극적인




그의 상체는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그의 눈꼬리는 한없이 쳐져있어 순진무구했다.

그 누구도 해하지 않을 눈빛에 나를 가두고,
적당한 거리에서 원하는 만큼 취하고,
가고 싶을 때 가버릴 수 있는.
허나, 그 시간은 나에게는 영원에 가두었다.

<오랜만에 쓰는 휴가에 절 만나도 되나요..?>
<작가님 때문에 휴가 냈어요>



'윽.... 상냥한 목소리로 듣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사무실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문자 한 통에 울고 웃는 내가 한심스러웠지만, 그 벅찬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없음에 서글프기도 했다. 날 위해 하루를 비워준 그에게 당장 가고 싶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단숨에 올라, 목을 끌어안고 '많이 아끼고 있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루도 기다리지 못할 것처럼 심장은 날뛰었고, 그렇게 내게는 하루가 무척 길었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그에게 예쁘게 하고 가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꾸미는데 별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으며, 더군다나 재능 또한 없다.
하루 전 날 골라둔 원피스는 예뻤지만, 불편했고 불편한 만큼 그에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 편한 옷으로 입었다. 그를 만나기 전 미팅이 하나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은 미팅 장소에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으므로.

"죄송하지만... 뭐라 하셨어요?"

미팅하는 내내 저 말만 되풀이한 듯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집중할 수 없었고, 의미 없는 시간만 허비하기에는 그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이 일을 오래 할 생각이 없어요. 다음에 다시 뵙게 되면 그땐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일어나 볼게요. 사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거든요^^;;;"
"굉장히 솔직한 편이시네요. 좋습니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이쪽으로 올 거예요"
"누구 만나는지 살짝 여쭤봐도 될까요?"
"남편, 남편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건지, 그를 남편이라 생각해서 뛰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쿵쾅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 카페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뒤돌아 가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아무리 급하셔도 폰이랑 양산은 챙겨야죠?^^"
"아..... 감사합니다"
"또 뵙죠"
"네^^"


'바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나를 다그치긴 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그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하고 그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으므로 서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만난다는 생각에 쉬이 진정할 수 없었다. 서점에서 가장 지루해 보이는 책을 골라 한 페이지만 읽기로 했다. 길길이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으므로. 책을 고르던 중 내 책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선물할까...?'


책을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던 찰나, 그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쁜 일하다 들킨 것 마냥 책을 제자리에 넣고 전화를 받았다.

"한 바퀴 돌고 있을게요"

다정한 목소리에 나의 모든 신경이 홀린 듯, 그가 말한 대로 곧장 입구로 나왔다. 잠시 뒤 어떤 검은 승용차가 내 앞에 섰고, 창문을 내렸다. 미팅했던 남자였다.

"남편은 아직 안 오셨나 보네요?^^"
"아..... 다 왔다네요"
"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짓말이었지만, 나에게는 들켜버렸고 그건 숨기지 못할 만큼 짜릿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때의 떨림은, 그가 남편이었으면 하는 발칙한 생각에 짜릿한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눈에 익숙한 차.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
그는 덤덤했고, 너무나 침착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단숨에 풀이 죽어버렸다. 시무룩해졌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거, 진즉에 알고 있었잖아..'


그와 함께 있으면 그의 분위기에 서서히 안정을 찾는 내가 우스웠다. 안정된 그의 눈빛과 그가 가지고 있는 따뜻한 정서, 그 찰나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잘 지내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손 줘보실래요? 제 심장이 엄청 빨리 뛰고 있어요. 꼭 10킬로를 6분 페이스로 뛴 것 마냥요...'


결코 뱉을 수 없는 말들은 침묵 속에 사라졌다.
그의 표정, 그의 말투에는 설렘과 떨림은 찾을 수 없었다. 무척 평온해 보였다. 짝사랑이 주는 아픔을 고스란히 온 마음으로 받아내야 했다.

머리끝을 조금 정리하고, 새롭게 펌을 한.  중년이 진즉에 시작되는 나이였지만, 10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젊고 경쾌해 보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물결이 그를 더 다정하게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쉽게도 그 귀여운 삐죽 나온 머리카락은 더 이상 없었지만..

초롱초롱 영민한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는 눈꼬리가 길게 쳐져있어 순한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눈. 콧볼이 있는 편이지만 코끝이 동글고 콧방울이 살짝 내려가 있어 콧대가 높아도 유순해 보이는 인상과 바른 이미지를 준다. 그 아래, 가느다란 입술은 매번 앙다물고 있는 그.  그의 얼굴을 가만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므로. 그 와중에도 그가 운전을 하다 시선을 내게 두면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러했다.
옷만 조금 잘 입어도 훨씬 더 잘생김이 돋보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또 웃었다. 옷을 개떡 같이 입고 다녀도 불가항력적으로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이토록 늙은 남자에게 빠져버렸을까..

같은 식당, 같은 자리.
그리고 그와 같이 걸을 땐 항상 왼발이 먼저.
그는.... 내가 강박을 스스로 깨부수고, 그에게 가고 있는 나를, 그는 아실까. 단언컨대, 짝사랑에도 상이 있다면 나는 전 세계를 누비며 모든 상을 휩쓸 것이다. 분명하게도. 아마 그는 결코 모르겠지만...

마주 보며 앉아....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게 참 좋더라.
그 이유는 아마, 그의 미소. 눈을 찡긋 하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만들어 낼 때 그 어색함. 소리 내지 않는 웃음, 은근한, 살짝 머금은 웃음, 보기 좋은 미소. 그의 웃음은 순수했다. 늙었지만, 늙어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같지 않았다. 나는 그의 웃음을 좋아했다. 그런 웃음은 흔치 않으니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자꾸만 이야기하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았고, 그 틈에 나는 빠르게 행복을 만끽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일. 내가 꿈꾸던 삶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온통 내가 그리던 이상이었다. 이러니 내가 그에게서 더 못 헤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동경하고 꿈꾸는 이상이니까.
감히 갖고 싶다한들 결코 가질 수 없는 이상.

"물 드릴까요?"
"네^^"

목이 탔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면, 그렇게 목이 바싹 탔다.
단숨에 물 한 컵을 마셨고, 그는 다시 부어주었다.

"화장실 같이 가드릴게요^^"

부드럽고 조용히 말하는 그.
생색 따위의 말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문득,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상냥함은 내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그저 나는 따라 웃고 말았다.
닮고 싶었다. 분명, 동경이었다.

한결같이 이상한 모양새로 움직이는 젓가락질에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나는 꾹 참아냈다. 그러는 그는 나의 젓가락질 모습에 참지 않고 조용히 웃었고, 놀려댔다. 내가 봤을 땐 오십보백보였다.

"밥만 뜨면 반찬은 아빠가 항상 올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숟가락질만 잘하면 되었어요"

다시 그는 조용히 웃었다. 나는 그 말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뱉어진 말이었다. 말해버린 김에 그에게 아픈 말을 해버리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냈다.

'편집장님은 내게 상처만 주지만, 나도 사랑받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은 내뱉을 수 없는 나였다.
나는 그랬다. 그는 말주변이 없고, 나는 유독 그 앞에서만 말문이 막혔다. 마음을 숨겨야 하기에 그런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앞에서는 독백이 많아진다. 짝사랑의 비애일지도 모르겠다.

창 밖에는 흐림과 맑음의 변덕스러운 여름의 날씨가 한창이었다. 비가 내렸으면 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승합차 한 대가 매연을 뿜으며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아지랑이 같은 거다. 눈을 감아도 자꾸 생각나고 떠오르는 게, 자꾸 일렁이고. 뜨거운 한 여름날 햇빛을 가득 받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땅의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내리쬐니 속수무책으로 일렁인다. 나는 느닷없이 그에게 사랑이 빠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부터 속수무책으로 일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운명이었다.

우연이 그를 만났고, 우연이 그를 동경했으며,
우연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우연은 곧 필연이 되었다.
그를 찾아갔고, 그의 곁을 맴돌았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러나 인연이 되지는 못했다.
그의 연인 또한 되지 못했다.
그를 위해 수많은 우연을 만드는 내가 애처롭다.

밥을 빨리 먹는 그와 느리게 먹는 나.
우리는 참, 서로 다른 것이 많았다.
그것도 못내 서러웠다. 목이 메었다. 밥알은 입에서 맴돌고 슬픔은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모습이 그 사람을 닮았어요"

이미 슬픈 내게, 기어이 그는 나를 더 부추겼다. 미웠고, 또 미웠다.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하마터면 나를 버려두고 가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저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열심히 밥알을 꼭꼭 씹었지만,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올라오는 슬픔이 삼키는 속도보다 빨랐다. 그냥 남길 걸.. 미련하게 나는 다 먹어버렸다. 씩씩하게 보이고 싶었다. 분명 아빠 탓이었다... 탓을 해보았지만, 슬픔은 물러서지 않고 내게 맞서고 있었다.
그 슬픔은 그의 차에서 위로받았다. 그의 향기로 그득한 차가 나를 보듬어 안았다. 포근했다. 이내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다. 울어버릴걸. 그 사람 앞에서 펑펑 울어버릴걸. 그랬다면 속이 시원했을 텐데.. 왜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쉬러 가요, 우리"


운전하는 내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분명. 그가 내 옆에 있고,  함께 가고 있었으며, 같이 웃고 있었으니까.

'우리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요....?'

'수천번 보러 가지 않겠다 다짐했고, 수만 번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다시 당신에게 가있어요. 가끔은 이런 내가 미친 것 같고, 가끔은 너무 당연해서 헷갈려요. 우리 그냥 도망가요. 당신 없인 안 돼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냥 말해볼걸.. 해보고 너무 진지하면 작가라서 그렇다고, 직업병이라고 말하고 웃고 넘길걸.

그에게 선물이 되지 못한 선물은 다시 돌아왔고,  그는 내 선물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다음에 다른 선물로 선물하라고 했다.

'다시 볼 여지를 준 건, 분명 당신이에요. 후회하지 마요'


삐뚤빼뚤, 어설픈 모양으로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날 위한 선물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가 주는 선물이 그게 뭐든 마음에 안들 수 없었을 테지만... 쇼핑백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그는 내가 출근하지 않아 이 모양이 되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날 좋아하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행동과 말투였다. 하나, 원래 다정하니 그런 것이라며 더 이상 나를 희망고문 하지 않기로 했다. 날 위한 방어태세였다.

"다 쓰면 얘기해요. 그때 또 사줄게요^^"

바보..  문방구에서 사기당한 것이 분명했다.... 멍청이. 호구.
그래, 그는 똥멍청이였지?
내가 알던 키다리아저씨는 알고 보니, 어설픈 중년 아저씨였다는 사실을 기어코 뒤늦게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 누가 더 어리석을까...?

'다시 볼 여지를 준 건 또 분명, 당신이에요. 사달라고 찾아갈 거예요...'


"양치질 10분 동안 할 셈이죠??^^"
"아뇨^^"

장난기 가득한 농담도 듣기 좋았다. 어쩜 저렇게 예쁜 모양으로 말하는 거지? 저런 상냥한 농담이 세상 어디 있을까.. ㅋ 1시간 하려던 양치도 그의 한마디면 금방 마무리할 수밖에.. 무척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낯선 공간, 어색한 분위기. 충분히 어색했다.
익숙할 법도 한데, 익숙지 않았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목마른 자가 먼저 우물을 판다 했던가..
그에게 다가가 입술을 닿았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반겨주었다. 앙다문 입술은 벌어졌고, 입안은 차가웠다. 그의 입술이 몹시도 달았다. 달아서 미칠 거 같았다. 나의 들숨과 날숨에 욕망이 뒤섞여 있었고, 달달한 그의 혀를 뽑아내고 싶었다. 저급한 표현이지만,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바싹 타들어 갔던 입은, 그의 혀와 마주하고서야 갈증이 사라졌다.
갈망할수록 갈증 나는, 탐욕.
입술이 아닌,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메마른 사막에 달달한 것이 닿자,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침륜했다. 내 안의 욕망은 몸부림치며 끝없이 떠오르고서. 그것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었다.  사라지는 내 영혼을 잠시 머물게 하는_ 그 이상이었다. 그를 탐닉하고 나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허나, 실상은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끌림을 그땐 알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
욕망 없는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욕망뿐인 관계라도 뛰어들고자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갖고 싶었다. 그 마음은 숨길 수 없었고, 숨겨지지 않았다. 매번 이런 식이다. 잘 참고 있던 탐욕을 건드는 건 매번 그였다. 그의 허벅지 위에 오르고자 하는 나와, 단추를 풀려는 그. 힘이 센 그는 망설임 없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 손에는 망설임과 설렘은 없었다. 그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그의 손길이 닿는 것도 오랜만이었던 탓일까. 단추를 풀고 있는 부드러운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토록 부드러운 건 '그' 였기에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세상에 이렇게 부드러운 남자가 있는 걸까.
왜 내게는 강한 자들만 있는 걸까.

그는 매번 혁대를 잘 풀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풀 수밖에.. 멍청이...
반면엔 속옷은 한 번에 벗겨냈고, 가슴에 닿는 그의 날숨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 들숨 날숨이 뭐라고... 그의 날숨 한 번에 나는 무너져버릴까, 왜 나는 그럴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나와는 달랐다. 연륜일까, 경험에서 오는 여유일까.
그는 가볍게 가슴을 입에 물고 혀로 두어 번 터치하자 몸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손이 엉덩이를 향했고, 나는 속옷을 잘 벗겨낼 수 있게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그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었다. 그의 손길은 아득히 고요했지만, 강하지 않아 오히려 더 강했다. 내게는... 강하지 않은 손길이 더 강했다고 하면, 전달이 되려나. 자세를 바꿔 내가 위였다. 그의 살결 위에 닿는 순간부터 어지러웠다. 살짝 벌려진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가 덮어버렸다. 그의 숨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거든. 허리를 잡고 있는 손길이, 그 온기가 너무 좋았다. 낯선 내 모습도, 어색한 모든 것에 대해 그 손은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허리를 잡고 있는 부드러운 손가락에 깍지를 껴 잡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우습게도 손을 잡는 것보다 그와 몸을 섞는 게 더 쉬운 상황이 참...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게 그와 나의 거리였기에. 그가 내게 선을 일부러 긋지 않아도 그와 나의 보이지 않는 거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는 못내 구슬퍼, 그를 못살게 괴롭히고 싶었다. 가히, 갖지 못한 물건을 망쳐버리고 싶은 못된 심보였다. 허나, 그에게선 보여선 안 되는 마음이었다. 실망하고 버려질까 두려웠으니까... 그러지 않을 그라는 걸 누구보다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내가 잡고 있는 이 끊어질 듯한 관계마저 끊어져 사라지면 나는 죽고 말 테니까...
그의 입술에서 떨어져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씻었음에도 그의 살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나는 그의 냄새가 그렇게 좋더라..  포근하고, 따뜻하고..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냄새라고 말하면 알아들으시려나..  나의 저급한 글재주는 내 감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직 작가의 길은 한참 멀었나 보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욕정이 타올랐다. 혀끝으로 목덜미를 조용히 핥았다. 그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내 몸은 그럴 수 없었다. 젖고 있는 내 몸은 그를 끌어오고 싶었으니까.  입술을 그의 몸에서 떼지 않고 그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의 낮고 뜨거운 들숨과 날숨이 크게 들려왔다. 타액과 혀의 움직임 소리가 뒤엉켜 크게 들리는 듯했고, 얼른 입속으로 그의 가슴을 가둬버렸다. 나의 타액이 그의 상체로 물들이고서야 나는 그의 중심으로 내려갔다.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고, 한껏 쳐진 눈꼬리와는 대조적이었다.

'당신이 내게 오면요... 난 당신의 사회적 위치 말고도 모든 것을 세워줄 수 있어요. 이것까지도요'


입 밖으로 뱉어질 리가 만무했다. 그랬다면 당황스러워하실 테지.. 빤하지. 나는 솔직한 편이었지만, 그 앞에서는 늘 솔직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두고 어느 누구는 솔직하다 부러워했고, 어느 누군가는 발칙하다 혀를 끌끌 찼다. 상대를 내 시간으로 끌어오는 이 순간들이 대체로 발칙하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가 많다. 솔직한 고백들은 언제나 도마 위에 올랐다. 나는 우회하지 않는 편이고, 직설적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끌리면 끌린다고, 싫으면 싫다고,  멋있으면 멋있다고 한다. 눈치게임으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그'가 대입되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말에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무겁다는 반증이기도 했고...  글로 먹고살고, 입담으로 먹고사는 내가 그에게는 돈도 명예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통하지 않으니, 가히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에게 발칙하고 싶다. 발칙함은 설레게 하는 일이고, 센스이면서 예술이다. 타이밍과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설레게 하고 싶다...

처음부터 그와의 관계는 욕정으로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그건 마치 전에는 제대로 차려진 음식을 먹어본 경험이 없다가 갑자기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게 된 상황이라고 말하면.. 적합한 표현일까. 나는 그를 게걸스럽게 탐식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대로 차려진 음식은 처음이고, 식욕이 엄청 강하다면 말이다. 결코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글을 쓸수록 저급한 단어들과 문장들을 쓸 수밖에 없는 내가 답답할 뿐이다.
인간의 소화 과정은 섭취와 배설로 이루어진다. 두 행위 모두 생리학적 경로를 통하지만,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의미는 다르다. '먹는 것'은 쉽게 영상에서 먹방이라는 소재로 소비되지만, '배설되는 것'은 은밀히 비공개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그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아무도 다루지 않는, 배설이 예술이 될 수 있도록_ 글로, 예술로 표현할 수 있다 생각한다. 어쩌면 그 배설은 성욕이다. 어떤 날은 배가 많이 고프고, 어떤 날은 허기짐을 참을 수 없다. 그렇게 음식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르고, 차오르고, 견딜 수 없을 때 바깥으로 나온다. 원초적인 배출은 욕망이자, 그것을 나는 글 쓰는 행위라 부른다. 나의 배설은 그렇게 글로 표현되고, 그때 나는 그를 갈망한다. 어쩔 때는 배출이 나를 무너뜨리지만, 그 속에서 해방되고 비워진다. 글로써 나는 사정을 하며, 글로 성욕을 푼다. 언제부턴가 내 글은 어딘가 끈적하고, 저급하고, 욕망이 잔뜩 묻어있다.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아프다. 병에 걸린다. 이 병을 섭취하지 못한 욕망이라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배출을 하지만, 그 배출의 방식은 각기 다르다. 나처럼 글로, 또 육체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춤으로... 배출된다. 그는 나의 유일한 뮤즈이면서 동시에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자다. 그를 알기 전엔 사랑이 없던 것처럼 영혼 없이 활자만을 나열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내 글에는 영혼이 실리고, 감정이 실리고, 마음이 실렸다. 그리고 사랑이 써진다. 사랑 없이 글이 안 써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지근한 그에게서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를 지닌 건 단단함이면서 동시에 혼자 중력을 거스르고 솟구치고 있다. 물오른 버드나무처럼 속살도 가지런히 물이 올라 있었다. 혀끝에 닿자,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타액과 체액이 뒤섞여 한껏 농밀해졌고, 나는 그의 가장 연약한 곳으로 향했다. 그 길이 쉽도록 내게 다정히 열어주었다. 아마 나에 대한 다정과 배려는 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뭐가 다른 거지....'


연약한 곳은 내게 더 연약함으로 드러냈고, 입속에서는 마치 보드라운 사탕을 물속에 머금고 있듯 흘러넘쳤다. 저번과는 달랐다. 달라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내가 잘 못한 건가?

"얘 작게 만들어주세요"
"안 돼요...^^"


아니, 왜?

나는 반문하지 못했고, 최대한 다정히 물었다.

"닿지 않으면 되지 않아요?^^"
"네, 안 돼요^^"

맨날천날 안된다고만 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단호히 말할 건 또 뭐야?? 진짜 안 되는 건지, 안 하고 싶은 건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소심한 나는 궁금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입은 기어이 그의 입술을 덮고서야 벌어졌다. 한 순간에 그가 나와 자리 바꿨다. 그 마저도 내게 다정했다. 소중한 이를 눕히듯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런 오해를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가질 수 없었고, 가져서도 안 되는 사람임을 분명히 안다. 문득 내게 슬픔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올려다본 그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고, 다정한 낯빛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 다정함에 파묻혀 살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몸에 닿는 그의 입술에 본능처럼 모든 세포를 집중시켰다.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강하지 않음으로 내 몸에 강하게 새겨졌다. 그는 숨소리 마저 다정다정할 것만 같았다.

"간지러워요"

손등으로 막았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막지 못했다. 그 간지러움은 그를 내게 당장 끌어오고서야 해결이 될 듯했다. 다시 그와 자리를 바꿨다. 맨살과 맨살이 닿는 느낌이 교묘히 자극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내 세상과 그는 서로 미끌거렸고 그의 도움으로 그는 내 세상으로 들어왔다. 진입을 허하지 않은 그가 들어오듯 아팠다. 아프지만, 중독될 만큼 좋은 느낌이었다.

"아파?"
"아니, 좋아"

그가 말을 놓으면 나도 말을 놓았고, 그가 존대하면 나도 존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일관성이 없었다.
유독 더 아픈 듯했다. 해서 더 깊은 듯했고..
나의 중심을 가로질러 들어온 그는 제 집인 듯 들어왔고, 꽉 찼다. 현기증이 날 만큼 좋은 건지.. 아팠던 건지... 모르겠다. 허나, 그는 내 눈앞에 있고,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아픔은 그가 내어준 낭만에 사라졌다. 한 순간이었다. 이래서 사랑이 무섭다는 거다. 다리를 세워 그와 더 가까이 닿고자 했고, 내 욕심이 과할수록 그는 깊었다.

"이거.. 너무 깊이 들어와도 괜찮아요?"
"아파요?"
"아뇨 아뇨. 그런데 너무 깊이 들어온 거 같아요"
"난 좋아요"
"나도요..^^"


꽤 깊었고, 어딘가 닿는 느낌에 덜컥 무서웠다. 해서 나는 계속 물었고, 그는 계속 같은 답만 되풀이했다. 그의 입을 내 입으로 막아버렸다. 또 똑같은 대답임이 틀림없었다. 아래에는 그의 단단함이 입에는 그의 혀로 가득 차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겁죠?^^;;"
"아니요"

"힘들죠??"
"아뇨^^ 좋아요"

내게 보여줄 낭만이 아직 가득 있는 듯했고, 그가 내어준 로망에 허우적거릴 내가 불 보듯 뻔했다. 벗어날 수 없었다.
움직이는 나를 들었다.. 들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는 건데...

"너무... 야한 거 같아요"
"^^"


그는 예쁘게 웃었다. 어둠에 적응한 내 눈은 그 웃음이 선명히 보였다. 웃는 모양새마저도 온통 로망이고, 낭만이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래는 강했고, 위에는 보드라움에_ 강한 것이 자극인지 부드러운 것이 자극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얇은 입술이 귀에 머물렀고, 미지근한 혀는 나를 무자비로 괴롭히기를 작정했다. 쉽게 무너져버릴 나였다. 나는 또 기어이 그의 위에 있고자 했고, 그는 그런 나를 알고 웃으며 배려했다. 분명 그는 바람둥이가 틀림없는 듯싶었다.
깊었지만 깊은 만큼 그와 더 가까워진 듯했다. 무릎을 세워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의 표정에 평온함이 사라져 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을 차릴 수 없었고, 체면 따위는 벗어던진 지 오래전이었다. 손을 빨고, 손등을 깊숙이 빨아 소리를 막아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에 대한 욕망과 갈망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힘들죠?^^::"
"도리도리"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아픈 건지 뜨거운 건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를 다시 조심히 눕혔고, 그의 손은 간지러운 곳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자세 싫어하죠?"
"아뇨"


'당신과 함께 닿고자 하는 일에 싫은 일 따위는 없어요'
'이제 내가 아래 있어도 무섭지 않게 된 건,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이 나올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손으로 입을 막아보았지만, 고스란히 나의 소리는 그에게 들리고 말았다.

"쌀 거 같아요"
"안에요"


밤하늘의 불꽃놀이 하듯 연신 터지고, 또 터졌다.
여름의 절정에 겨울의 함박눈은 어김없이 뿌려졌다. 무더운 여름은 쉬이 진정될 기미가 없었고, 다정히 내뱉던 그의 호흡도 가빠져있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매번 그런 나를 잡은 건 분명 그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눈가가 밝아졌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도 따라 웃었다.
참을성을 길러 온 건지... 그는 내게 자랑했고, 덕분에 오래 아팠고, 며칠 피를 봐야 했다. 화장실 갈 때마다 쓰라린 통증은 내가 그에게 질척거린 만큼 고통이었다. 헌데 그 통증이 내게 머물렀던 그와의 시간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당신에게 갈게요.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면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죠.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여서 기어코
활화산처럼 터져버릴 거예요.
그러면 나는 배를 타고 불의 강을 건너요.
가는 길이 쉽지 않겠죠.
나를 불사른다고 해도,
눈물로 불의 강을 잠재를 수 없어도 말이에요.
당신이 그런 나를 조용히 보듬어준다면,
그 품에 안기어 재가 되어도 좋아요.
죽음보다 그리움이 더 아프거든요.


나의 글이 요즘 삐딱선을 타고 어긋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진심이 있다.
그와 하나가 되려는 절망적 시도.
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는 간극.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비극적인 내 사랑.
그 끝은 절망이다.
절망 없는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