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 가을이 잔뜩 묻어있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기분 좋은 미지근함 속에 조금은 선선한 바람. 한 여름의 폭폭 찌는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면서 이 서늘한 바람 한 점이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그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엄마, 나 학원 마치고 새로 생긴 공원에서 축구할래>
<아빠 회식이라던데?>
<치....>
아이의 힘 빠지는 목소리가 전화기 넘어 들렸다.
그렇게 일단락된 듯싶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 **이랑 같이 축구하러 가도 돼?>
<걔도 온데?>
<응, 금방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래. 저녁 먹고 축구하러 가자>
오후 7시.
해가 점점 짧아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선해진 날씨에 부대끼고 엉켜있던 마음이 잠시 풀리는 듯했다.

그와 아들 둘은 미리 나와 공을 차고 있었다. 고개 숙여 짧게 인사하고, 첫째 아들들은 그와 함께 축구를 했고, 나는 둘째들과 함께 공을 주고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에 흠뻑 젖은 첫째들은 내게 달려와 물을 마셨다.
"우리 술잡 할래?"
"그래, 좋아"
아들 넷은 우르르 달려가 '안내면 술래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그와 나는 남겨졌고, 우리는 걸터앉았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려면 체력이 필수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름이 언제 오나 했는데 금방 또 여름이 지나갑니다?"
"그러게요^^ 오늘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네요"
"예뻐요"
"응??? 네???"
"아침에 볼 때랑 다른데.. 뭐가 달라졌지??"
"화장도 안 했고... 츄리닝인데요??"
"ㅋㅋㅋㅋㅋㅋ찾았다"
"뭔데요??"
"부기가 빠졌네요 ㅋㅋㅋㅋㅋ 아침에 햄스터였는데, 지금은 다람쥐예요. 하하하"
부기 빠진 게 뭐 이렇게 웃길 일인가...?
그렇게 웃던 그가 일순간 웃음을 멈췄고, 그 이유가 뭔지 알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눈을 먼저 피한 건, 그였다.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 그도 분명 사람 눈을 오래 마주치는 성격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아니, 사람을 왜 그렇게 빤히 봐요?"
"그럼 어떻게 봐야 되는데요?"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만..."
"째려본다고 뭐라 하고, 눈 흘긴다고 뭐라 하고, 빤히 쳐다본다고 뭐라 하면 나는 어떻게 보고 이야기해요?^^"
"왜 웃어요??"
"아뇨, 그냥 웃겨서요. 약점인 듯해서? ㅋㅋ"
"커피 마실래요?"
"네, 제가 다녀올게요. 얘들 보고 앉아있어요"
"아뇨, 요 앞인데요 뭘. 금방 다녀올게요"
아들 넷은 뭔가 잘 섞이지 않을 듯하면서 꽤 잘 어울려 놀았다.
편의점 봉다리가 묵직해 보였다.
"얘들아, 아이스크림 먹자!!!"
그의 한마디에 아들 넷은 한꺼번에 달려왔다. 땀에 흠뻑 젖은 아이들에게 각자 취향대로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나에게는 커피를 그는 캔맥주를 집었다.
선선한 가을바람, 공원을 밝혀주는 부드러운 조명, 쌉쏘롬한 커피맛, 그에게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평범함 속에 나는 행복했다. 오랜만이었다, 행복이.
그가 벌컥벌컥 맥주 마시는 소리를 듣기 전에는 말이다.
한 모금 마시고 싶어졌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물망으로 올라갔고, 우리는 또 남겨졌다.
"맥주를 사 올걸 그랬나요??"
넋 놓고 맥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가 말을 걸었다. 얼른 도리도리도 답하고 시선을 아이들에게 두었다. 사실은 딱 한 모금이 마시고 싶었다.
'왜 저렇게 큰 걸 사 온 거야.....'
캔맥주 중에 제일 용량이 큰 걸 마시고 있는 그. 괜히 심통이 났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부러웠다.
내 시선은 맥주 넘기는 소리에 그에게 다시 돌아갔고, 이번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목젖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목젖에 손이갔다.
신기했다. 다른 사람의 목젖을 이렇게 본 적이 없어 한번 눈길이 가니 계속 눈이 글루만 갔다.
"저.... 한 번만.."
만져봐도 돼요?라고 물을 뻔했다. 내가 이렇게 솔직했던가...
"예???"
"저 한 입만 마셔도 돼요?^^"
"ㅋㅋㅋㅋ네 드세요"
그는 캔맥주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커피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웃었다.
"왜요?? 진짜 한 입만 마셨는데?"
"아니, 대부분 캔맥주를 가져가서 마시고 나서 주지 않나요?"
"아....."
"역시 특이해^^"
"죄송해요"
"아니에요^^"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요^^"
"그죠 ㅋㅋ 딱 노상 하기 좋은 날이에요. 형님 오늘 집에 있지 않아요? 같이 나오시지"
"아뇨.. 오늘 퇴근하고 회식하러 갔어요"
"아.. 그럼 형님은 밖에서 거하게 한잔하고 오시겠네요?^^"
나는 그의 말에 순간 얼어버렸다.
"네.. 그렇겠죠?"
"형님 술구세 있죠?"
"네?? 무슨 말이에요?"
"휴가 때 형님 술마신다니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왕창 마셨잖아요. 그리고 그날 형님이 그쪽 술 엄청 싫어한다던데... 뭔가 말이 안 맞아서..."
"술,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마시다 보니깐 글이 잘 써지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마셔요. 그리고 혹시 그날 남편 술구세 보셨어요?"
"아뇨 아뇨 못 봤어요"
"남편, 술구세 없어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맥주를 마셨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뭔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마실래요?"
"끄덕"
이번엔 캔맥주를 그의 손에서 받아 들고 빨대를 꽂아 마셨다. 역시 한입 뺏어먹는 것이 내 것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웃음이 났다.
"설마 그거 마시고 취한 건 아니죠?"
"압... 그 정도 아니에요"
"그 정도 맞아요. 내가 본 최고의 알쓰..ㅋㅋㅋㅋ"
"우리 이제 일어날까요? 추워요"
"추워요?"
"네, 가만히만 있어서 그런지 조금 춥네요"
그는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빠르게 벗었고, 내게 둘러주었다.
"입고 계세요. 얘들 데려 올게요"
"끄덕"
그는 아이들 쪽으로 달려갔고, 나는 그가 등을 보고 달려갈 때 다시 빨대로 한 모금 쪼옥 들이켰다. 그리고 살며시 내려놓았다.
내 아이들은 내게 달려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핑하고 튀어 올랐고 어지러웠다. 두 팔을 허리에 올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엄마 물 주세요!!!!!"
우리 여섯은 그렇게 공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내 작은 둘째 아이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어부바해야겠어. 다리 아파ㅠㅠ"
나는 조용히 아이 앞에서 쪼그려 앉았고, 내 아이는 목을 세게 끌어안고 등에 찰싹 업혔다. 1시간 40분을 그렇게 뛰어놀았으니 피곤할 법도. 내 좁은 등에 한쪽 뺨을 기대어왔다. 아이의 따뜻한 볼이 나른하게 만들었다. 분명 취기가 오른 듯싶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목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찾아들었고, 나는 너무나 익숙한 손길이었으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허~~ 밖에서 만지면 안 되는 데??"
그제야 나는 그에게 등을 돌려 아이에게 말했다.
"졸려서 그렇지? 집에 가서 얼른 샤워하고 코 낸내하자"
작은 아이는 아쉬운 듯 옷에서 손을 뺐고, 다시금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만져요?"
"졸릴 때는 자동이더라고요.."
"밖에서 그러다 실수하겠어요"
"괜찮아요. 아줌만데요 뭘....^^;;"
그는 억지로 찡긋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들어가 보세요"
"네. 내일 아침에 봬요. 아!! 외투!!!"
"그냥 입고 가요. 내일 주세요"
"그래도 돼요?"
"안될 게 뭐 있나요^^"
"감사해요. 내일 봬요^^"
"엄마 말씀 누가 누가 잘 들었는지 내일 확인한다??"
"네!! 삼촌 빠빠이~~"
"이모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네^^"
잘 자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게 상냥히 굴었고, 나도 그에게 날을 세우는 일이 없게 되었다.

<뒷날 아침>
남편과 함께 등원•등굣길에 올랐다.
얘들 등교 후 셋이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바뀐 선생님 어떻던가요?"
나, "괜찮으신 거 같던데요...?"
남편, "얘들 선생님 바꼈어?"
나, "응, 이야기했잖아. 학습지 선생님 바뀐다고... 냉장고에도 붙여놨고"
그, "저는 앞에 선생님보다 더 괜찮은 거 같더라고요. 남자고, 젊고"
남편, "남자?"
그, "아직 못 보셨나 보네요?"
남편, "근무 때문에 아직..."
그, "20대라 젊고 열정도 있는 것 같고 괜찮더라고요"
남편, "20대?? 그렇게 젊어?"
나, "선생님이 젊든 늙었든 그게 뭐가 중요해. 얘들 잘 가르쳐주고 얘들이 잘 따르면 되지"
남편, "내가 야간 때는 집에 없으니까.."
나, "뭘 걱정하는 거야??"
남편, "닌 이상하게 젊은 얘랑 잘 꼬이니까 걱정돼서..."
나, "얘들 선생님이셔....."
그, "잘 꼬여요?"
남편, "어. 이상하게 젊은 남자랑 잘 꼬이더라고"
나, "내가 언제!!"
그, "인기가 많으신가 봐요"
나, "아니에요"
남편, "택도 없이 어린 얘들한테만..."
나, "ㅡㅡ"
그, "형님이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 하하"
나, "사랑?"
집에서
"애기 아빠 앞에서 그런 말을 왜 해..?"
"걱정되니까"
"오빠는 20대에 애 둘 낳은, 내일모레 마흔 아줌마 만나고 싶어?"
"....."
"똑같아. 난 그냥 아줌마일 뿐이야. 학부모.."
맞는 말을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슬펐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구슬펐다.
가을이 온 탓이었다.
'감성 글쟁이 > 엽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엽편소설)#2-25 첫 담배 (9) | 2025.09.15 |
|---|---|
| 엽편소설)#1-342 비극적인 (11) | 2025.09.13 |
| 엽편소설)#1-341 귀했고 귀했지 (0) | 2025.09.09 |
| 엽편소설)#1-340 미련이 남아서 그래요 (0) | 2025.09.08 |
| 엽편소설)#1-339 잃어버린 우산 (5) | 2025.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