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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36 하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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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다가도, 문득 당신이 떠올라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깊은 밤공기가 차가워질 즈음, 창문 너머 희미한 별빛과 환한 달빛이 두 눈에 담긴 순간, 잊으려 했던_잊어야 하는_당신이 불쑥 내게 찾아와요. 그런 당신을 나는 또 어김없이 되뇌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엔 늘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분명한 사랑이에요. 이게 사랑이 아닐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잖아요.
잠을 자야 하기에 이번 주 약을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현대인의 고질병이라고 하죠, 불면증 말이에요. 약이 또 몸에서 적응을 했나 봅니다. 이른 저녁잠에 들었지만, 새벽, 어둠이 깊을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어요. 커튼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이 방 안을 채우고, 고요한 공기가 머물러 달콤해요. 요 며칠 푹 잤더니 머리가 맑아요. 이 새벽의 침묵 속에서 마치 오래된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올리 듯 공허한 마음을 가득 채워요. 당신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선명히 지나가요. 당신을 보러 가는 발걸음에서 오던 두근거림, 눈을 마주칠 때마다 피어오르던 작은 설렘과 떨림, 그저 따뜻하기만 하던 안부, 보드라운 손길에서의 온기 그리고 온통 당신의 배려 한가운데 있는 듯한 배려까지.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는 살아있어요.

당신을 보러 가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근데, 갈 수가 없어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당신에게 향하는 모든 것들이 온통 사랑이라서요. 숨기려 해도 어느 틈엔가 사랑이 들통 나 버릴 거예요. 분명 그럴 거예요.
글은 이미 다 썼어요. 분량을 채운지도 오래되었고요. 아마 내 글을 보지 못한 당신은 그저 공적인 이유로 내가 오지 않는 거라 생각하시겠죠.
길어야 한 시간 정도 머무르는데 자꾸만 찾아오는 내가 당신은 부담스러우실까 봐, 싫어하실까 봐 차마 갈 수가 없어요. 그럴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그러면 내가 받을 상처는 너무도 클 것이기에 무서워요. 알아요, 당신이 착하고, 얼마나 배려 깊은 사람인지요. 내게 티 내지 않으셔도 당신에게서 사랑이 아님은 단번에 알겠지요. 그것도 내게는 상처예요. 당신이 나를 연민과 동정으로 보는 것도 이제는 상처가 될 거란 말이에요.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보러 간다면, 그때는 나 사랑해 줄래요?

가야 하는 핑계는 넘치고 넘쳐요. 사랑의(?) 부적도 당신에게 전해주어야 하고요, 비를 좋아하시는지, 내게 잘해주시는 저의가 무언지도, 왜 내게 느닷없이 사과를 하셨는지도, 과거로 돌아가면 나랑 사랑하실 건지도 물으러 가야 해요. 당신을 보러 갈 때마다 하나씩 물어볼까 하며 상상을 하곤 해요. 그러면 적어도 다섯 번은 당신을 볼 수 있으니깐 말이에요. 왜 용기 없는 내 쪽에서 가야 당신을 볼 수 있는 걸까요.. 하긴, 만약에 당신이 내게 와야 당신을 볼 수 있는 거라면, 당신은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거죠? 그걸 생각 못했네요. 어쩔 수 없는 짝사랑이자, 외사랑이 그렇죠 뭐.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웃긴 이야기지만요, 직업이 작가니 별 수 있겠어요. 너무 당신 보고 싶을 때면요, 과거로 돌아가서 당신과 함께 할 순간들을 그려봐요. 꽤 재미있고 충분히 행복하거든요.
아주 마음껏 먹고 갈 만큼 집밥을 준비해서요, 당신과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거예요. 배 통통 두드리며 내가 모르던 당신의 이야기를 모조리 듣는 거예요. 당신의 친구들이 기억하는 당신 이야기도 죄다 빠짐없이 알고 싶거든요. 그렇게 당신의 친구들이 떠나가고 나면, 당신에게 그때 그 이야기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 그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마음껏 조르고 싶어요. 나는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세상에서 머물고 싶거든요.  


봄이 오려는지, 차가운 겨울 틈새 따뜻함이 묻어나요. 그 바람결에 실려오는 향기가 기어코 그리움의 문을 엽니다. 뚜렷하리만큼 선명하게 떠오른 그리움은 때로는 축복이고, 때로는 저주가 돼요. 지금은 저주예요.
물결치는 감정의 호수 위로 영원 할 것만 같았단 착각들. 하지만 영원은 없죠.  
저요, 이번에 쓰던 글 다 쓰고 나면요, '카사노바의 지침서'를 주제로 글을 써보려 해요. 맞아요. 내가 본 당신의 단면적인 모습으로 카사노바를 정의해 보려고요. 소설 아니고요, 장르는 에세이로 말이에요. 당신을 바람둥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 같은 사람이 카사노바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해명하는 내용을 담을 거예요. 바람둥이 오명을 내가 벗겨줄게요.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 이거예요.
당신을 위해 쓰는 글을 멈추지 않으려고요.
수없이 당신을 이유로 글을 쓰지 않겠다 다짐할 때도 있지만, 당신을 써야만 하는 내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로, 미워하면 미워하는 대로, 마음껏 쓸 거예요. 원하는 대로 해야 원 없이 잊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요.



만일,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비로 내린다면요, 아마 온 세상이 빗물에 잠겨버릴 거예요. 모두가 돛단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죄다 둥둥 떠다닐 테지요.
그리고 만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눈으로 내린다면요, 아마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모두가 눈 속에 갇혀버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테지요.
당신을 적당히 좋아하고, 사랑하던 마음은 적당히를 지나쳐 무지막지해졌어요. 중간이 없어요. 이토록 한시도 허투루 좋아하지 않아요. 무지막지하게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온 마음을 전부 사용하여 빼곡히 사랑할게요.
잘 자요, 당신.
아니, 일어날 시간이에요.
오늘도 당신을 그리며 밤을 새웠어요.
더 센 약을 처방받아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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