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리고 여린 엄마와 강한 아빠 사이에서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한테는 첫 딸이고,
조부모한테는 첫 손녀이고,
부모님의 형제들한테는 첫 조카이다.
봄의 기운이 세상에 푸릇푸릇 뒤덮인 어느 봄 날이었다. 19세 여고생인 엄마를 첫눈에 반한 25세 아빠는 처음 본 여고생을 내 여자로 만들겠다 다짐했고, 끝내 아빠의 사랑은 이루어졌다. 그렇게 19살 공부 잘하는 어린 여고생은 나를 임신하게 되었고, 공부를 꽤 잘한 엄마는 대학진학을 앞에 두고 포기를 했어야 했다. 수많은 반대와 질타에도 어린 엄마는 뱃속에 살아 숨 쉬는 나와 사랑하는 아빠를 포기하지 못했고, 결국 스무 살, 여자 인생에서 제일 예쁜 나이에 나를 낳았다. 내가 태어난 후 결혼 반대하던 두 집안은 잠잠해지고 평온을 되찾았다. 19살 어리고 여린 엄마는 임신 기간 내내 결혼 반대로 불안했고, 나는 불안이 높은 아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내 어린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양가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의 부모는 당장 먹고사는 일을 걱정해야 했다. 그렇게 아빠는 군인이 되었고, 엄마는 그만두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외할머니 댁에 잠시 맡겨졌다. 어린 엄마였으니 외할머니 또한 젊은 아줌마였다. 외할머니에게는 막내 즉, 나에게는 외삼촌이 10살 차이 나는 삼촌이 있다. 조카와 삼촌이 아닌 오빠 동생처럼 그렇게 함께 자랐다.
장사를 하시던 외할머니 밑에서 엄마 머리를 닮아 산수를 잘해 거스름 돈 계산을 잘한다고 또 한글을 잘 읽는다며 6살에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노래를 잘 부른다며 가수를 시켜야겠다며 동네사람들과 외가댁에서 내게 곧 잘 노래를 시키셨다. 그러나 친가에서는 내 뒤에 여동생이 태어나고부터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동생을 보지 않고 여동생을 봤다고 화살이 나와 엄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일곱 살 때 엄마는 드디어 남동생을 낳았고,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남아선호사상이 시작되었다. 나를 향해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하시곤, 내 사주가 엄마를 닮아 남자를 홀리는 사주라며 고작 일곱 살인 나를 불여시라 부르기 시작했다. 활짝 웃으면 불여시가 따로 없다, 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린 얘가 왜 그리 청승맞게 우냐 등의 트집을 잡으며 나를 눈치를 주셨지만 아빠가 있을 때는 나를 사랑하셨다.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그 일을 알게 되었고, 그 일이 있고부터는 친가에 가지 않았다. 명절과 제사 때 말고는 일체 가지 않았다. 명절과 제사 때에도 가지 않으려 했지만, 항상 늘 엄마를 이길 수 없는 아빠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 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나에게 나는 사랑으로 만들어졌고, 사랑 속에 태어난 소중하고 귀한 엄마아빠의 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며 강하길 바라셨다. 그동안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아빠와 엄마로부터 깨끗이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과 남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서부터 강해지길 바라셨고,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는 건 살아갈 때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동생들과 다르게 좀처럼 강해지지 않았고, 거기에 흥미도 없었다. 집에서 책 읽기만 하는 내게 강해지기를 아빠는 포기한 듯했다. 그 일은 내가 아빠를 이기는 처음 있는 일이 되었다. 결국은 아빠가 나를 평생 지켜주기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나이만 먹어 사춘기 한번 없고 부족함 없이 세상물정 모르는 나이만 먹은 철없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크는 딸이 또 아빠는 걱정이셨다. 이제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어 아빠의 무게를 덜어줄 남자를 만나길 원하셨고, 20대 후반을 수없이 많은 남자와 맞선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중년을 앞두고 있는 중년 여자가 되고 있는 중이다.
중년을 앞두고 이제야 나는 진짜 사랑을 찾았다. 아쉽게도 짝사랑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에게 명명백백한 사실이고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지금도 열열하게 진행 중이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내가 20대에 그를 만나 내가 젊음이라는 패기로 용기 내서 나의 짝사랑이 아빠처럼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그를 우리 집에 내가 사랑하는 남자라고 데리고 갔더라면 얼마나 우리 아빠 엄마가 좋아하셨을까? 맞선 볼 때마다 늘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나를 배웅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죄인인 양 내 부모는 나를 맞선자리로 보냈었다.
다음에 먼 훗날, 시간이 지나면 나의 부모님께 이야기해드려야겠다. 나도 누군가를 많이, 한없이 많이, 사랑했었다고 그러니 나를 안쓰러워 말라고. 여자로서 행복을 충분히 누렸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아빠랑 엄마랑 했던 사람만큼 원 없이 사랑하고 사랑했다고 꼭 말씀드려야겠다.
나는 그가 너무 좋다. 분명히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책에서 봤는데 내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려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를 향한 나의 간절함은 배가 되어 시간이 흐른다. 오늘과 내일의 내 사랑에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내 간절함은 그가 알았으면 했다가도, 절대 몰랐으면 좋겠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알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사랑하면 안 됨을 선 긋는 일이 될 것이고, 그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은 나 혼자라도 이렇게 한없이 그를 내 마음에 품고 있고 싶기에. 어쨌든 이 사랑에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별로 없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도 너무나 혼자하는 일방적인 사랑이다. 다시, 그를 내 마음에서 내보낼 땐 덜 사랑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도 사랑하기에 부족하다. 더없이 사랑하고 덧없이 사랑해야 한다. 혼자 하는 이별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다. 오늘도 나는 소리 없이 사랑을 외친다.
사랑하는 어른남자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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