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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7 가을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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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과를 마치고 샤워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징징징 ㅡ징징징ㅡ징징징ㅡ"

전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계속된 진동의 소리는 연속으로 내게 오는 카톡 알림 소리였다.
술자리 장소와 빨리 오라는 내용, 그리고 사진 찍자며 예쁘게 하고 오라는 카톡이었다. 그제야 부리나케 외출 준비를 시작했고 몇 분 걸리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카카오택시를 부르고 내려갔다. 오랜만에 나가는 저녁 외출에 잔뜩 긴장했고, 택시를 타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아파트 입구를 나왔다. 밤냄새는 이미 가을냄새가 잔뜩 묻어났고, 내 몸을 지나가는 바람 또한 여름은 온 데 간 데 없고 가을뿐이었다. 도착한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예쁘게 꾸민다고 예뻐지나?? 하얀 바지와 하얀 블라우스에 굽 없는 갈색 샌들. 그리고 검은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가는 길이다. 안경은 벗었고 대충 찍어 바른 화장.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익숙한 친구 모습이 보였고, 이제야 긴장이 풀어지고 활짝 웃었다. 반가웠다. 다들 늦게 온 내게 한 마디씩 던진다.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 저번에 볼 때보다 더 빠졌다, 넌 왜 안 늙냐, 어디 피부숍 다니냐, 보톡스 맞았냐, 애인 생겼냐.... 숨 좀 쉬고 물어봐주겠니.
나 포함 8명이 모이기로 했으나 5명만 모여있다. 아이가 아프다느니, 뒷날 벌초 있는 걸 깜빡했다느니, 생리가 터져서 못 온다느니의 이유로 빠졌다고 했다. 내가 오자 인스타에 남겨야 한다며 연신 단체 사진을 찍어댔다.  이미 친구들은 술에 취한 건지 대화에 취한 건지 다들 조금씩 취기가 오른 듯했다. 친구 한 명이 나도 왔으니 자리를 옮기자 했고 우리는 근처 술집으로 갔다. 어제 통화한, 나를 예삐라 부르는 친구는 목청 터져라 예비신랑을 목놓아 부르고 애달피 찾았다. 미혼인 친구 둘은 시세한탄하듯 서로 맞선 봤던 최악의 인물들을 묘사하느라 바빴고, 기혼인 친구들은 남편험담과 시댁 욕하느라 바빴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나름 발이 넓다고 소문난 친구가 남자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이 나왔고,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었다. 미혼인 친구 둘은 서로 자기에게 소개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통화했다. 둘 중 선택하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친구 각각 직업과 외모를 이야기하며 누구와 소개팅을 할 건지 묻는 통화였고, 상대의 내용은 들리지 않은 채 통화가 끝마쳤다. 모든 친구들은 그 친구의 대답에 집중했고, 그 친구는 "지금 자기 친구들이랑 일루 온대. 괜찮지? 너네 둘! 딱 이 언니가 시집보내준다" 다들 환호했으나 나는 불편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타인과의 술자리는 썩 내키지 않았다. 한창 떠들고 노는데 남자 셋이 들어왔다. 셋 중에 두 명은 누가보아도 총각인 게 티가 났고, 한 명은 누가 봐도 아저씨인 게 티가 났다. 기혼인 줄 알았던 남자도 미혼이었다. 3명의 미혼인 남자는 35세로 무려 연하였다.
그렇게 여자 다섯에 남자 셋이 테이블을 붙여 앉았다. 발 넓은 친구는 우리 모두를 소개했고, 남자를 소개했다. 낯선 타인이 합석한 이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불편했고 집에 갈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부자연스럽게 보였을 테고 셋 중 총각 같아 보이는 남자가 나와 발 넓은 친구를 보고 말했다. "누나, 저 하얀 누나는 원래 말이 없어? 우리가 온 게 못마땅해하는 거 같은데?"
내가 먼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조금 낯설어서 그렇다고. 그리고 발 넓은 친구가 내 말에 덧붙였다. "낯가림이 심해서 그래. 친해지면 다른 모습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못 볼 듯. 경계가 풀리려면 오래 걸리거든"
친구 말에 그 총각은 일어나서 소주병을 들고 내 옆으로 왔다. "그럴 땐 술이 최고다" 며 내게 술을 따르려던 참이었다. 옆에 앉은 친구가 그 술잡을 대신 받으며 "얘는 술 못 마신다. 나를 따라주라" 말했고 나 대신 한잔 마셨다. 술병만 들고 서있던 그는 이내 콜라를 주문했고 내게 "콜라는 괜찮죠?" 하며 내밀었다. 유리컵에 가득 부은 콜라를 들어마시려던 참이었다. 내 팔을 잡는 그 남자는 "누나, 나도 따라줘야지. 주고받는 매너가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내민 소주병을 받아 들고 그의 술잔을 채웠다. 건배를 하자는 그가 조금은 불편했고 금방 내 표정이 티가 났으리라. 발 넓은 친구가 남자 목덜미를 잡는 시늉을 하며 "니 자리로 가!!!"를 외쳤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총각은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보면서 "저 하얀 누나는 직업이 뭐예요?" 물었고, 친구들은 "소설작가", "회계사무원", "인플루언서"를 외쳤다 ㅋㅋㅋ 순식간에 졸지에 직업이 다양해져 버렸고, 어느 게 진짜 직업이냐고 묻는 그에게 "전부 내 직업 맞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이야기 대상이 나로 바뀌었고, 취조하듯 캐물었다. 다들 취기가 오른 만큼 나는 결국 캔콜라 4병을 해치웠고,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절대 공중화장실을 가지 못한다. 특히 술집은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토사물이 묻어있을지 모를 변기를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이미 친구들은 인사불성이고 정신이 똑바로 있는 친구는 안보였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도 넉넉히 30분은 걸릴 듯했다. 결국 옆에 친구한테 따라가 달라했고 같이 걸으려 했으나...  이건 내가 부축해서 가는 꼴이라 도로 앉혔다. 다른 친구도 마찬가지였고 혼자 심각했다. 콜라는 4병이나 먹게 한놈이 그런 내게 물었고, 물음에 답하는데 주위가 시끄러운지 안 들린다면서 내 옆자리로 다시 왔다. "화장실이 가고 싶은 데 갈 수 없다고요" "왜?" "더러우니까" "그럼 옷에 쌀 거예요?" "아뇨! 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일어나요 깨끗한 화장실 알아요" 이 한마디에 나는 벌떡 일어났고,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시끌벅적한 술집을 벗어나 어느 빌딩 건물 화장실인데 비번이 걸려있었다. 알려준 비번은 맞았고 화장실은 깨끗했다. 그러나 나는 변기통이 또 무서운 사람이 아닌가; 화장실 문을 잡고 고민하는 내게 "별로 안 급한가 보네?" "아뇨 그게 아니라 무서워서요" "뭘 더 해야 볼일을 봅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화장실 앞에까지 와줄 수 있나요?" "전 괜찮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네네" 그를 잡아끌고 화장실 문 앞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기 이왕 죄송한 거 한 번만 더 죄송할게요. 화장실 문밑으로 그쪽 발 좀 넣어주세요 ㅜ 제가 볼 수 있게요 정말 죄송해요"
그는 말없이 화장실 문 밑으로 신발을 내게 보여주었다. 급한 볼일은 끝이 났지만 그 뒤에 남은 민망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물을 내려야 하는데 이 또한 무섭다. 나의 영혼이 변기통으로 빨려갈 거 같은 느낌. 그렇다고 낯선 그에게 물을 내려달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멀었냐는 그에게 볼일은 끝났는데 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변기통 뚜껑을 닫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물을 내리기 무섭다고 말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고 만다. 그리고 나오라는 제스처를 하고 대신 내려주었다. 민망하고 창피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두 번 볼 사이는 아니니깐 괜찮다며 나를 계속 달랬다 ㅜㅜ
뒤에서 손 씻는 나를 빤히 보는 총각. 신기하게 봤을 테다. 이상한 여자로 봤겠지. 네가 그렇게 대놓고 보지 않아도 충분히 민망하니 그만 봐주지?
손을 씻고 뒤를 돌아 총각을 보고 민망함에 활짝 웃었다. "그쪽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ㅡ^"  빌딩 화장실에서 나와 술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장실을 더러워하고 무서워하는 이유와 설명을 해주었고, 너무 감사하다고 몇 번 감사한 마음을 전달했다. 말없이 가는 게 너무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했다.
다시 술집으로 왔을 때 핸드폰 속 시간은 2시 10분이었고, 먼저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맨 정신이 아닌 친구들을 두고 갈 수 없었고, 각자 택시를 태워 보내고 가기로 했다. 비틀거렸지만 입은 살아있는 내 친구들.. 한 명은 택시 태워 보내고, 또 한 명은 대리를 불러 보냈으며, 미혼인 두 친구는 주말에 더 외롭다며 둘이 함께 잔다고 둘이 택시 타고 갔다. 친구들 집으로 보내는 걸 도와준 그 총각과 아저씨 같다던 총각만 남았다. 아저씨 같은 총각도 가고, 나도 서있는 택시를 타고 가려고 콜라 준 총각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여러모로 감" 여러모로 감사하다는 내 말을 잘라먹고  "우리 한잔 더 할래요?"라고 말하는 그.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불안이 시작되었다. "아뇨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우리 집 여기서 가까운" 이번엔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저 집에 가야 해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마지막으로 택시를 향해 달렸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내 손등은 입에 머물러있었다. 불안과 공포가 날 찾아왔다. 에어컨 켜지 않은 기사분이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가을바람과 가을 냄새가 나를 위로하듯 휘감았다. 깊고 진한 가을 향에 그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이 시간에 나와본 적이 태어나서 3번째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에 나와있다는 기분, 어둠으로 덮인 곳을 배회한다는 기분과 춥진 않지만 가을바람이 주는 쌀쌀함 이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 틈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미는 나의 어른남자. 그를 떠올리면 설렘이 가득 차서 내 불안이 조금은 크기가 작아지는 듯하다. 그가 보고 싶다. 기사분께 우리 집 말고 그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그를 향해 가고 싶었다. 낯선 환경, 낯선 시간이지만 그와 있으면 행복할 거 같았다.  갑자기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 당황할 때쯤 택시는 미끄러지 듯 집 앞에 도착했다.  조용한 새벽, 샌들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 샌들 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걷다 이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가을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싶었다. 달리고 달려서 그에게 한달음에 가고 싶었다. 빠르게 걸을수록 허벅지가 땅기는 느낌에 걸음을 다시 천천히 걸었다. 중문 앞에서 손소독을 하고 중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내 짧은 자유시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름 가을 새벽을 만끽했다는 기분은 만족했다. 매번 이렇게 그의 생각으로 침대에 누우면 퍽 잠이 쉬이 들지 않는 걸 알지만, 이제 자기 전에 그를 그리워하는 일은 내 하나의 루틴이 되고 말았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보러 가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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