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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2 풍요속의 빈곤


풍요가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꼭 나를 보고 하는 말 같다.
물질적인 문제에 있어 나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그를 사랑하고 나서 이 빈곤은 마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마냥 야금야금 나를 조금씩 집어삼켰고 그를 나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게 만들어놨다. 애초부터 내 마음은 그의 것인 듯 나를 쥐고 휘두르고 있다.

#어제저녁 아홉 시 반

글을 다시 써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그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상실감으로 내 기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 기분을 빠르게 씻어 내고 싶어 곧장 화장실로 행했다. 입고 입던 실내복을 벗어 내리고, 칫솔에 치약을 신경질적으로 짜서 입에 물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단단히 뿔이 나있었고, 그 화살을 어디로 쏴서 분풀이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그 화살이 나에게로 가야 함을 알아챘다. 기분이 나의 감정까지 지배해 버렸고,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애써 외면해 버렸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숨이 막혔으니까.
화~한 치약 거품을 입에 가득 머금고 속옷을 벗었다. 여전히 내 몸은 그가 머물렀던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사이에서 느껴지던 그의 꽉 참으로 인한 흔적은 물로도 씻어지지 않았다. 다시 그 기분으로 나를 금방 가득 채웠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첫 남자는 아니었다. 두 번째 남자다. 첫 남자의 기억은 다들 추억 속 향수처럼 꼭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강제와 강압은 아니었으나, 평소 불안이 높고 긴장을 많이 한터라 사용해 본 적 없는 부위에서 오는 고통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결국 응급실에 갔었다. 이게 나의 첫 경험의 기억이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는 달랐다. 내 몸은 애초부터 그를 향했던 것처럼 이끌리듯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육체적인 사랑만을 원하는 게 아니었음을.
툭 까놓고 그도 사내다. 나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더라도 육체적인 대화는 어떻게든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내가 가질 수 없다. 거기서 오는 허함이 나에게 너무나 컸고, 허망하기까지 하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그를 보내줘야 한다. 나에게서 그를 잡아둘 명분과 핑계가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을 품게 되는 시작점이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내 몸에서 그의 흔적을 찾고부터 나의 기분은 다시 설렘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향긋한 샴푸 속에서 고개를 드는 내면의 소리.

'이대로 그를 안 볼 자신 있어?'

공교롭게도 그럴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이 짝사랑의 끝은 나의 고백으로 끝맺기로 다짐했지 않았던가? 그래, 우리 한국사람들은 가위바위보조차도 삼세판을 해야 승부가 난다. 그를 마지막으로 딱 3번만 더 보기로 하자. 그의 마음을 포기하는 대신 나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자.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냥 나만 생각하자.

세 번의 만남 중에 꼭 한 번은 용기를 내어야만 한다.
사무실 말고 밖에서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그와의 육체적인 대화에 마침표를 찍어야 뒤에 미련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한 일에 대한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고백이 결코 아니다. 내 사랑이 그의 기억 속에 머물러 삶이 힘들 때 날  꺼내어 그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고백이다. 그의 과거 속에 내가 머물기 위함이다. 그의 삶에 기억되고 싶은 나의 바람이다. 이 또한 욕심이겠지만, 이 정도 욕심은 부릴 것이다.

이 세 번의 만남이 나와 그에게 강렬하게 남았으면 한다. 더 이상 보지도, 만나러 가지도 않을 것이기에 본능에만 충실하기로 다짐해 본다. 나와 그에게 추억으로 남겨질 일이기에.  그런데 날 만나주려고나 할까...?
몽글몽글한 거품으로 내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낸다. 물과 함께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씻겨내려가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한편으론 내가 상처받지 않게 그가 씻겨나가길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가 너무 갖고 싶다. 지독히도 갖고 싶다. 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관계인 건 뻔히 알지만, 그가 좋은 걸 어떡해.
나는 그가 좋다. 정말이지 그가 좋다. 그러나 갖고 싶다한들 다 가질 순 없는 일. 포기할 때엔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는 쿨한 여자가 되지 못한 내가 못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