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요일 오후,
강변 따라 1시간을 달리고 집에 돌아와 약과 하나를 입에 물고 곧장 화장실로 향한다.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고 땀과 잡생각을 샤워기 물줄기에 흘려보낸다. 그리고 시원한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내일 그를 만나러 갈 생각에 행복한 상상에 젖어들었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내 마음은 풍선 마냥 부풀어 올랐고 이 행복이 주는 설렘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따르릉 따르릉"
행복에 젖어있는 나를 방해하는 앙칼진 휴대전화 벨소리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예 사무장님"
"잠시 통화되나?"
"예, 말씀하십시오"
"아까 얘기했던 거 사정 좀 봐줘 부탁할게"
"싫어요!!!!!! 내일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
"나 좀 살려줘, 진짜 나 한 번만 살려줘"
결국은 내가 하기로 했다. 대신 강의가 끝나면 회사를 들리지 않고 바로 퇴근하는 걸로 허락해 주셨으며, 사무장님의 배려(?)로 운전기사까지 붙여주셨다. 넉넉하게 왕복 2시간 반 잡으면 그를 보러 가는 시간에는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러 가는 날에는 항상 일이 생기고 바쁘다. 젠장. 그래도 내일 그를 보지 못하면 다음 주나 돼야 볼 수 있는데 그때까지는 내가 그를 보지 않고서는 안될 듯싶다.
짝사랑은 체질에 안 맞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짝사랑을 이어 가고 있는 가여운 날 위해 이번에도 내기를 걸어본다.
왜 자꾸 사랑에 도박을 거냐고?
강박과 불안이 있는 사람에게는 원인제공은 곧 용기이다. 이미 일어났으면 하는 일에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고, 그 필요한 용기를 북돋기 위한 명분과 핑계가 바로 도박이자 내기이다. 이건 강박과 겁이 많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자 수단이다.
그러므로 나는 또 결과가 빤한 내기를 나에게 걸어주기로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겠다만, 사랑은 감추기 어렵다. 그를 연상케 하거나 떠올리게 되면 반사적으로 내 눈꼬리와 입꼬리는 반달을 그리며 사랑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짝사랑 중인 나를 통해 짝사랑의 묘미를 알 것만 같다. 바로, 불확실성의 즐거움.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해 더 궁금해지는 심리. 도박이나 중독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사람 중독. 나는 지금 그에게 단단히 중독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랬다. 지금 내가 하는 사랑을 멈추게 했다간 나의 반발심은 더 할 듯하여 그냥 나를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말이 좋아 지켜보는 거지. 아무 반응 없는 그의 반응에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길 바랄 뿐.
'그를 봤을 때 마스크를 하지 않고 있다면, 고백할 것이다'
항상 늘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기를 걸어본다. 마스크 하고 있어 주길 바라야 하는 건가 아니면 벗고 있길 바라야 하는 건가.
짝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알아야 보고 싶을 때 그의 얼굴을 떠올리겠지? 이번엔 마스크 속 그의 얼굴을 꼭 보고야 말 테다. 몇 년 치 용기를 끌어다 써야 마스크를 벗길 수 있을까.. 과연 벗길 수는 있을까.
그동안의 나의 만행과 실수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중 가장 큰 실수는 나의 불안과 강박 그리고 공포에 관한 걸 이야기한 일이다. 그리고 알약 하나를 못 삼켜서 뱉어낸 모습, 손 빠는 모습,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흘리는 모습, 우는 모습 등등 나를 뭐라 생각할지 안 봐도 뻔하다.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비쳤을까. 철저하게 그를 향한 마음을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편없는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불쾌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약속된 시간 안에 도착하면, 마스크를 꼭 벗길 것이다'
이건 답이 빤한 도박이 아니라 진짜 도박이다. 강의가 제시간에 마칠지도 의문이고, 우리팀 막내 점심 먹여서 시간 안에 오는 게 가능할까? 또 한 번 내 사랑을 운명에 맡겨보기로 했다. 그게 어느 쪽이든 나에겐 손해는 아니다만, 용기를 낼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이다.
'감성 글쟁이 > 엽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엽편소설)#1-14 현실로 돌아갈 때 (33) | 2024.08.24 |
---|---|
엽편소설)#1-13 인생만사 일장춘몽 (1) | 2024.08.23 |
엽편소설)#1-11 모르는 이를 향한 질투 (2) | 2024.08.22 |
엽편소설)#1-10 갖지 못한 것에 대한 (2) | 2024.08.21 |
엽편소설)#1-9 짝사랑이 아니다 (2) | 202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