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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65 다정한 침입자도 침입하였기에 유죄인거죠


말만 번지르르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나,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사람이었다.

집 앞에 모르는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택배 송장에 받는 이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맞았으나, 내용물은 내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내게 보낼만한 주변 인물들에게 물었으나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등굣길)

"삼촌!!!"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네??^^"
"유치원 마치고 엄마랑 공원에서 축구하기로 했어요!!!"
"우와~ 재미있겠다. 삼촌이랑 형아도 같이 끼워주면 안 돼?"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요"

내 작은 아이는 대장인양 허락을 고민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중해 보였는지 꽤나 웃겼다. 어쩜 내 배에서 나왔는데 저렇게 남편을 닮아 있을까...
골몰히 고민하는 중에 차량이 도착했고, 아이는 손을 흔들며 차에 올랐다. 그는 차량 창문에서 우는 척을 했고, 내 아이는 껄껄 웃었다. 아이들에게도 다정한 그였다.
첫째들과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조잘거리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교문까지 도착했고, 우리는 아이들 뒤통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벌써 벚꽃이 지고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네요"
"아! 어제... 겹벚꽃은 폈던가요?"
"아뇨. 아직이요. 일주일은 더 있어야 되겠더라고요^^"
"아.. 아직인가 보네. 아참! 맥주는 왔죠??"
"????!!!!!!! 그쪽이 시킨 거예요??"
"네^^"
"왜요????? 잘못 시킨 건 아닐 테고??"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 말고 무알콜 마시라고요"
"나 요새 약 먹느라 술 안 마시는데요?"
"그럼 놔뒀다가 행님이 술 마시고 들어온 날, 술 찾을 때 무알콜 줘요"
"???"
"같이 마실 때 보니깐 취하면 자꾸 더 마시려 하더만요..."
"아.... 맞아요..."
"취하면 이게 무알코올인지 알코올인지 잘 모를 거예요"
"아.... 네"

전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주문한 것이 틀림없었다.
민망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하여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게 끝이에요?"
"네?? 아..  감사해요.."
"또 뭘.. 감사하기 까지야...."
"근데... 무알콜도 취하던데요...?"
"그건 그쪽만 해당되는 겁니다 ㅋㅋ 그거 마시고 취하는 사람 진짜 그쪽 밖에 없어요^^"
"그런가요 ^^;;;;"
"무알콜인데 어째서 취하는 건지 참... 보고도 신기했어요. 맥주냄새에 취하는 건가???"
"나도 몰라요??^^;;;;;"
"전에 골프 치고 시원한 맥주가 땡겨서 무알콜 마셨거든요? 대리 부르기 싫어서요. 집에 오는데 음주단속 했는데 알코올 측정도 안 나오더라고요"
"진짜 알코올이 없는 거구나.."
"그러니깐요. 취하는 그쪽이 이상한 거예요"
"치.... 네"
"아무튼 맥주 그쪽이 마시지 말고 행님이 찾으면 줘요"
"나 걱정돼서 산 거예요? 나 괜찮은데.. 이제 술 많이 안 마시기로 약속했거든요..."
"그 약속이 안 지켜질 걸 뻔히 알면서 또 믿는 건.. 무슨 심리예요?"
"....."
"...."
"그렇게라도 믿어야 살아지니깐요. 거기에 계속 매달려 지옥에서 살 순 없잖아요. 그쪽 말대로라면, 언젠가 죽을 텐데 돈을 왜 벌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을 왜 해요. 어차피 죽을 건데..."
"그러네요^^ 그 생각을 못했네요"
"왜.. 내가 미련해 보이나요?"
"그건 아닌데, 그냥 좀..... 안쓰러워요. 신경 쓰이고..."
"^^;;"

앞만 보고 걸었지만, 분명 동정과 연민의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를 볼 수 없었다.

"오빠가 나 많이 사랑해요"
"알아요^^;; 저, 행님이 덜 사랑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는 꼭 말꼬리를 무는 편이다.

"아... 네. 맞아요. 그냥 그렇다고요^^"
"긴장 안 해도 돼요. 나한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요"
"....."
"안심해도 괜찮아요"

그는 내가 긴장하고 예민해지면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준 말은 너무도 다정했다.

긴장 안 해도 된다.
나한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안심해도 괜찮다.

갑자기 다시 찾아온 시린 겨울 속, 그의 한마디는 봄이었다.
그가 내게 보여준 다정은 온기가 그득한 따뜻한 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봄 속에 있었고, 그는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안전하다고 속삭였다. 그의 다정에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그의 봄속에 오래 갇혀 여름이 오는 걸 온 몸으로 막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