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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1-416 텅텅흐리 다정은 내게로 행했어요






수많은 처음을 지나, 나는 숨을 고른다.
그 처음들이 어느 순간 내 안에 잔잔한 물결처럼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 처음들을 지나는 동안 때로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고, 때로는 두려움에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에게서 처음이라는 의미가 나와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그와 처음을 함께 도모하는 일은 그게 설사 나쁜 일이라 해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그를 보지 않기로 자처한 마음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조금은 가벼웠다. 그래, 그를 보지 못해 죽어가는 것보단, 사랑이 아닌 척 그를 보는 편이 골백번 나으니까...
시선이 닿았고 침묵했지만,
내 마음은 그에게로 흘러갔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은 정직하게 그에게만을 향했다.
내 마음만 숨기면 되는 것을, 이리도 쉬운 것을, 뭐 한다 어렵게 만들어 나를 말라죽게 했던 걸까..

사랑이 아닌 척 그에게 던진 질문에 때로는 좋았고, 때로는 슬펐으며, 때로는 아팠다.
허상과 망상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음에 아름다울 수밖에..

"횟수가 정해져 있는 건가요?"
"나야 모르죠..."
"왜 몰라요?"
"나도 처음이니까요"
"그럼... 우리가 하는 게 틀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아무 말이 없기에...
뭐가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모르고 했던 행동들이 옳다고 믿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그동안 죄다 틀린 걸 했을 수도 있으니... 나는 엉터리 마저 마냥 좋았다. 우리는 옳은 것들은 죄다 버리고, 틀린 것만 모두 끌어안고 있는 꼴이... 그 꼴을 그와 함께 한다는 건, 꽤 낭만적이었다. 그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거면 그 처음을 다시 써보고 싶었다. 엉터리지만 하고픈 망상과 허상을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조금 야해도, 조금 이상해도 그는 내게 틀렸다 하지 못할 테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그도 모르시기에.. 그럼 나는 내가 옳은 일인 양 굴테고 그것만큼 큰 낭만은 없을 테니까. 우리가 '처음의 서사'를 함께 쓰는 건, 너무도 로맨틱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다시 찾을 일이 없을 것이란 걸 안다. 그를 보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릴 땐 언제고, 그리움이 익숙해지고 무뎌질 때쯤 나를 다시 흔들어놓는다.
언제쯤이면 그의 연락에 설레지 않고, 무뎌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온다면 그에게 묻고 싶다.

나를 다시 찾는 진짜 연유가 대체 뭐냐고..



"전에, 내게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어 주신 적 있었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아니면 현실이 아닌, 허상인가요??"
"호감...이었어요"

짝사랑이 들키기 전이었다. 어째서 내게 호감이었다는 거지..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인데 호감이었을 리 없잖아. 곱씹어 봐야 하는 문장이었다. 이렇듯 그는 내가 자꾸 그를 되뇌게끔 만드는 인물이다. 결국, 나는 또 에먼 발만 동동 굴렀다. 호감, 호감이었다. 그가 내게 닿았던 연유는 호감이었고, 내가 그에게 닿고 싶었던 건 사랑이었다.

"그러면 목도리는 왜 다시 풀었다가, 다시 둘러주셨어요?"
"그건 아빠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때 너무 추웠고, 작가님은 추워 보였 고요^^"

수많은 다정으로 꼼짝없이 나를 그에게 묶어두었다. 그의 다정은 ㅇ다정하리만큼 슬프고 아팠다. 그의 호감이며, 모든 다정이 내게로 향하는데 우리는 헤어져야 했으므로.

"둘 중에 한 명은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괜찮아요. 당신은 아니겠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이에요. 내게서 당신은 사랑 아닌 감정을 담을 수 없거든요'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싶었다.
사랑 없이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 나를 사랑하시라고. 그러나 그에게는 입도 빵긋하지 못했다. 다시 나를 보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사랑 없이 당신은 가능한가 보죠? 난 아니거든요.. 절대요'

그러나 그 말 또한, 내 마음을 숨겨야 하는 입장에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또 침묵해야 했고, 그가 만들어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내 눈물을 보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 그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일은 무언가 숨겨야 되는 일이기에...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의 시선, 다정, 체온, 온기, 닿아 있는 모든 면들을 내내 그리워하다 골병이 깊게 들었다.
그러던 찰나,
넓은 가슴팍에 안긴 포근함에, 그를 세게 내 삶으로 끌어안아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도 좋을 만큼 그가 탐이 났다.

"mbti가 뭐예요?"
"몰라요.."
"그거 모르면 옛날사람이에요"
"우유부단하고..."
"그죠? 우유부단하고 흐리멍덩하시죠?!!"
"아니에요!!!!"

맞았다. 그는 우유부단했고, 술에 물탄 듯 술에 물탄 듯 흐리멍덩한 성격이다. 텅텅흐리 텅텅흐리 똥멍충이.
삽시간에 그가 미웠다. 내게 보여준 다정은 우유부단하기에 여기까지 끌려온 것. 적어도 나만은 다른 작가와 달리 특별하기를 바랐으나 그저 그런 작가들 중 나는 한 명이었다. 그는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짝사랑 중이라고 말할 적에는 밥을 사주고, 닿았을 것이다. 한순간에 내 사랑이 무게를 잃고 한껏 가벼워짐을 느꼈다. 슬펐다.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뿐이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또 오래가지 못했다. 눈매를 예쁘게 만들어, 그런 사람 아니라며 내 등을 토닥토닥 쓰담쓰담해주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주는 평온에 투정 부리고 싶어졌다. 실은 더 투정 부리면 더 애틋하게 쓰다듬어줄까 하는 못된 심보가 드르렁드르렁거렸고,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한편으론 스말 스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할 적에는 너무 많은 감정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다.
나는 또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흘러가는 마음을 채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