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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44 타인의 생각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사나요


<소설임을 명시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이제 곧 서른아홉이 되는 나는, 그 말을 꽤 오래 믿어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나아질 거라고.
그런데 이 말은 스무 살에도 들었고, 서른이 되었을 때도 들었다.
그렇다면 곧 마흔이 되는 나는 정말 괜찮아질까.
아니면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될까.
출근길에 거울 앞에 섰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눈 밑은 퀭하고 어둡게 꺼져 있고, 표정은 텅 비어 있었다.
단발머리, 작은 코와 입.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퀭한 눈과 겁먹은 눈동자.
어디선가 늘 만만해 보일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괜히 미간을 찌푸리고, 험상궂게 인상을 써본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은 강해 보일까 싶어서.
센 언니들처럼 아이라인 문신을 해볼까.
눈썹 문신을 하면 인상이 달라질까.
쓸데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이런 걸로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거울을 등지고 집을 나섰다.
지금의 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람처럼, 하루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살아내야 한다.
불안한 채로, 겁을 안은 채로, 그래도 오늘을 산다.





곱씹어보아도,
특별히 예뻤거나, 몸매가 좋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여름날의 기록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초여름, 스무 살의 일이다.
지금의 나는 서른을 훌쩍 넘겼고, 그때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발랄하다고 스스로를 믿던, 아주 짧고도 눈부셨던 시절에 서 있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막 벗고, 꿈에 그리던 사복을 입고 다니던 대학 새내기.
자유는 달콤했고, 세상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성인이 되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꽤나 대견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도 별것 아닌 하루였다. 금요일 오후 5시쯤..
강의를 마치고 친구의 쇼핑에 따라나서는 길이었다.
고맙다며 친구는 토스트를 사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토스트를 입에 문 채, 아무 걱정 없이 길을 걸었다.

“저기요…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꽤 잘생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여중, 여고만 다녔던 우리에게 ‘잘생긴 남자’는 그 자체로 경계심을 무디게 만드는 존재였다.

“네, 말씀하세요^^”

친구가 먼저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친구에게 꽃을 선물하며 고백을 하고 싶다는 말.
어떤 꽃을 좋아할지 모르겠다는 말.
도와달라는 말.

덧붙여,
순수하고, 깨끗하고, 착하고, 어리다는 여자친구에 대한 설명.
지금 생각하면 너무 많은 힌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도움을 청하는 사람 앞에서 ‘괜찮은 어른’이고 싶었던 스무 살이었다.
셋이서 꽃집으로 향했다.
친구는 신이 났고, 나는 낯선 동행이 불편했지만 애써 그 감정을 눌렀다.
유칼립투스, 퐁퐁소국, 거베라.
사장님의 손에서 꽃다발이 완성될수록, 나는 꽃 냄새에 취해 경계심을 잊어갔다.
그리고 그의 한마디.

“엇…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두고 왔네.”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사장님의 표정, 그의 시선, 그리고 친구의 눈길이 동시에 나에게 향했다.

“혹시.. 돈 가지고 있니? 요 앞이 집이라 바로 줄 수 있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네는 손이 왜 그렇게 가벼웠는지 모르겠다. 그 돈이, 내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대가가 될 줄도 모르고. 지갑을 가방에 넣고 꽃다발이 완성되기까지 꽃들을 구경하느라 바빴고, 친구와 그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꽤 신중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꽃집을 나서자마자 친구는 말했다.

“선혜야, 나 잠깐 뭐 두고 와서!”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았다.
도망칠 수 있었을까.
그때 돌아섰다면, 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까.

“우리 집 바로 저기야.”

낡은 골목 끝, 작고 낡은 대문.
나는 대문 앞에서 멈췄다.

“더운데 들어가서 주스 한 잔 마시고 가.”
"아니에요"

싫다고 말했지만, 거절은 계속 무시되었다.
결국 나는, 내 두 발로 그 문을 넘었다.
억지로 끌려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오래 괴롭혔다.
집은 좁았고, 냄새는 눅눅했고, 공기는 불쾌했다.
현관문이 잠기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며,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빌려간 돈만 받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고. 어리석었다.
유리컵에 주스를 가득 부어, 앉은뱅이 식탁에 올려두고 그는 지갑을 찾으러 들어갔다.

"꽃도 골라주고, 돈도 빌려줬는데.. 주스라도 마시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

샌들을 벗고, 유리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악의 상황에선, 손에 든 모든 게 무기가 될 수 있다.

“찾았다!”

그가 지갑을 들고 다가왔다.
내가 빌려준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내밀며 웃었다.

“나머지는 오빠가 주는 용돈이야^^”
"용돈은 필요 없어요"

빌려간 돈만 손끝으로 집어 들고 돌아서 나오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뒤에서 끌어안은 팔, 목덜미에 닿는 숨결.
그 순간의 공포는 아직도 몸이 먼저 기억한다.

“내가 준 돈 값에 이것도 포함이야.”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나보다 강했으니까.
절대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깨달았다.
힘이 없다는 걸 알았을까. 그는 한 손으로 뒤에서 나를 잡고, 한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나갔다.
아빠한테 수없이, 진짜 수없이 배우고 익혔던 것들을 떠올려냈다. 상대는 한 명이었으니.. 잘만 성공한다면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
그래서 나는, 온몸의 힘을 일순간 빼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리컵을 손에 쥔 채 바닥에 세게 내리쳤다.
깨진 유리컵을 쥐어 그의 발등에 꽂았다. 예상대로 깨진 유리가 그의 발등에 정확히 박혔다.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날카로워 보이는 유리를 다시 쥐었다. 잡히면 다시 이 유리는 그에게 향할 것이고, 그게 실패한다면 나의 목을 찌를 심산이었다.
욕설이 들렸고, 나는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었다.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프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살아야 했다.
골목을 벗어나자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군복을 입은 군인 셋.
왜인지 모르게, 그 옷이 너무 안전해 보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청바지에 체크난방”

그 말만 남기고 나는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울고 있는 엄마의 얼굴.
그리고 아빠는, 이미 경찰서에 있었다.

“잘했어. 너무 잘했어.”

그 말이, 나를 살렸다.

"엄마, 아빠가 잡혀간 건 아니지?"

아빠가 보이지 않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빠는 딸들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분이시기에. 분명, 그는 발등보다 꽤 많이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하셨다.

누가 도와달라 해도, 모른 척해라.
그 대신, 아빠가 평생 돕고 살겠다.

쓰러진 나를 군인들이 손에 쥔 유리 조각을 빼내려 했지만, 꽉 쥔 채 풀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나는 손금처럼 손바닥과 손목에 흉터가 있다. 다 아물었지만, 지금도 나는 그 부위가 아프다.
스무 살의 나는 오랫동안 나는 아대를 하고 다녔다. 나의 어리석음을 누가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 남자는 크게 다쳤고,
그 친구는, 그 고백의 대상이 나라고 말해 자리를 비켜준 거였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나쁜 생각이긴 하지만, 내 친구도 아닌, 왜 하필 나였을까. 그 많은 대학생들 중에 왜 하필 나였어야 했을까.
그 일은 꽤 흘러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나의 발목을 잡는 이유는 있었다.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누군가를 찔렀다는 사실.
나는 지금, 다시 아대를 하고 있다.
이 일은 다 잊은 줄 알았으나 누군가의 의해 다시 떠오르게 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