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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28 영화볼래요


맨 처음 당신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생각했어요. 당신과 엮이고 싶다고요. 그런데 동시에 콧방귀를 뀌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말이죠. 그러면서도 조심해야지 하고 생각은 했었어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게 사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랑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당신은 처음부터 조금 이상했어요. 내게만 향하는 친절과 배려가 분명 아닌데 나에게만 향하는 것처럼 느끼게 했어요. 아마 나 혼자 착각이었겠지요. 더 이상한 건요, 당신이 전부 알아버리고 나서부터였어요. "제가 그 똥멍청이인가요?" 이미 내 마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하고 여유로웠어요. 거기다 더 이상한 건요. 내 예상과는 다른 당신의 반응이었어요.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해요",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겠어요" 그게 다면 안되죠. 곤란하다, 부담스럽다, 싫다 하셨어야죠. 나랑은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엮이고 싶은 사람처럼 행동하잖아요. 내게 계속 잘해주고, 데려다주고, 웃어주고, 머리카락도 떼어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목도리도 둘러주고, 이야기도 들려주고... 모든 사람한테 이 정도로 잘해준다고요? 당신, 진짜 바람둥이 맞죠?ㅠㅠㅠ  나도 어디 가면 꽤 사랑 많이 받는 여자예요. 근데 항상 당신 앞에서는 처음 두 발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허둥대기만 해요.
그런데요, 당신이 내게 바람둥이처럼 헤프게 행동하는 거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 그거 말고 당신이 내게 해줄 게 없다는 것이 그게 날 무력하게 하고, 아프게 해요. 사실 그마저도 처음엔 행복했어요. 당신 옆에 잠시 있을 수 있으니깐요. 그런데 그 자리가 자꾸 탐이 나네요.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소유욕을 낳는다는 말이 맞는 듯해요. 뜬구름처럼 허황되고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지만, 또 아름다운 욕망이잖아요. 그게 사랑이잖아요. 사랑의 끝은 허무라 하던데.. 아직 당신과 끝이 나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말했지만, 사랑을 책으로 배웠거든요. 당신이 내 사랑의 맨 처음이에요.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요. 누구나 처음은 있으니깐요^^ 사랑은 책에서 배운 이론과는 다른 게 많아요. 실습은 당신에게 처음 하는 거라 굉장히 떨려요. 그래서 더 소중하기도 하고, 더 애틋하기도 하고, 또 간질간질거려요.
당신을 만날 용기가 생기면,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그 용기를 다 끌어다 쓰려면 언제쯤 당신을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비를 좋아하는지, 계속 당신을 보러 가도 되는지, 내게 잘해주는 저의가 무엇인지, 얼마 전에 왜 느닷없이 사과를 하셨는지, 과거로 돌아가면 나랑 사랑할 건지, 다른 작가들한테도 이렇게 다 친절하고 헤픈지.... 나, 다 물어볼 수 있을까요??ㅋㅋㅋㅋㅋ
아니, 이렇게 하루에 하나씩 궁금한 게 생기다가는 다음에 당신을 만나러 갈 때 공책에다가 적어가도 모자랄 판이에요.

며칠 전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를 봤어요. 유명한 명작이기에 내용은 익히 알고 있지만, 보진 않았었어요. 사실 개봉작이 2000년인데, 그때 내가 초등학생이라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영화였거든요, 분단을 뛰어넘는 병사들의 우정을 그린, 분단의 아픔을 현실감 있게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을 쓸어내렸는지 몰라요. 이병헌이 당신으로 보였으니까요..  이 영화가 25년 만에 오늘! 2월 4일 재개봉한다네요..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
농담입니다.
잘 자고 있는 당신 옆에 몰래 가서 가만히 눈썹 쓰다듬고 싶어요. 눈썹도 보드라울 거 같아. 잘 자요, 당신.


[아빠, 점심 약속 있어요?]
[아니 왜?]
[같이 점심 먹어요]
[갑자기? 그래 엄마도 같이 먹을까?]
[아뇨, 오늘은 아빠랑 둘이서만.]
[ *서방이랑 싸웠나?]
[아니ㅋㅋㅋ그냥 둘이 밥 좀 먹자요!]

그를 만나고 아빠와 단둘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날만큼은 오롯이 나도 누군가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바로 아빠니깐... 일방적인 사랑, 이미 알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외롭고 텅 비어버린 느낌, 채워야만 했다.
이날 점심 메뉴는 국수와 김밥. 그가 점심 메뉴로 정해져 있다던 식당 중 한 곳인 듯하여,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에게 우연이 아니지만, 그에게는 우연이라도 그를 또 보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온통 어른 남자로 가득 차있는 내가 웃겼다. 곧이어 부리나케 달려오신 아빠, 세상에서 날 무해하게 사랑해 주시는 분이다.

"아빠~~~~~"
"빨리 온다고 했는데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아빠 오늘날 따시드제??"
"어 덥더라. 시켰나?"
"주문했어"
"이제 말해봐라 무슨 일이고?"
"아이참, 아니라니깐! 그냥 아빠 보고 싶어서 밥 먹자고 한 건데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이야ㅠ"
"아이다. 분맹히 뭔 일 있다. 아빠가 딸 얼굴 보모 딱 답 나온다. 말해봐라"
"아이다캐도!!!"

'얼굴에 티가 나나?'

아빠의 성격을 알기에 머리를 굴렸고, 결국 핸드폰 속 상 받은 걸 보여드렸다.

"아빠, 내 상 받았다. 아빠한테 자랑할라꼬. 헤^^"
"문학상이면 엄청난 거 아이가?"
"아이다. 그런 거 아이다. 진짜 아이다."
"아이기는, 축하한다. 와 단톡에 안올맀노?"
"아빠 큰 상 아이다. 소리 낮춰.. 상금도 받았다 500"
"니!! 인마!! 상금 받았는데 아빠 국수 쏘고 입 닦을 끼가??"
"아니!!! 1차는 국수 2차는 국밥 3차는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난주 갈 때 사무실에 데려다줘"
"와? 오늘 출근 안 했나?"
"했지, 볼일 있어서 잠시 나왔어. 점심시간 끝나면 들어가서 마감해 놓고 퇴근해야지"

아빠가 분위기 좋고, 맛있는 카페가 있다며 그리로 가자고 하셨다. 국수 5그릇과 김밥 8줄을 나눠 먹고 평거동으로 향했다. 차 한잔 마시려고...

"공주야, 요새 또 못 자나?"

운전하시다가 날 보시더니 물으셔서 웃음으로 때웠다.

"살도 빠져 보이고, 운전도 안 하는 거 본께 또 못 자는가 싶어서. 맞나?"
"잘 먹고 잘 잡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내 이제 곧 마흔인데 공주는 쫌 아니지 않아?^^"
"아빠한테는 공주 맞다. 무슨 일 있으모 아빠한테 다 말해라. 그럴 때 있는기 부모다"
"예썰!"

오른손을 들어 눈썹 끝에 올린 뒤 손날만 보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빠가 활짝 웃으셨다.
곧이어 엄마 프로필 사진에 있던 그 카페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생강과 시나몬 향이 먼저 날 반겨주었다. 전체적으로 우드 스타일이 강한 인테리어로 포근한 인상이 딱 트렌디한 전통찻집 느낌이다. 차분한 느낌이 너무 좋은, 도심 한복판의 작은 카페.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고스란히 쏟아지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겨울의 공원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곳이 대추차에 진심이라는 아빠의 말에 대추차 2잔을 주문했다. 무던하고 묵직해 보이지만 멋스러운 잔에 대추차를 가져다주셨다. 사장님이신 듯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올려다본 사장님 눈은,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시면서,

"딸이 아빠랑 꼭 닮았어요"
"그쵸? 저 아빠 닮았죠??"
"네, 붕어빵인데요?"
"것봐, 난 아빠 닮았다고 했잖아"
"아닌데, 니는 엄마 닮았어"
"같이 오시던 사모님이랑은 외모는 안 닮았어요.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는 너무 비슷해요"

어렸을 때 항상 듣던 이야기였다. 활발한 동생들은 아빠와 성격이 닮았지만 외탁했고, 조용한 나는 아빠와 닮았지만 성격은 엄마와 똑같다는 소리. 그래서 늘 아빠한테는 내가 아픈 손가락이다.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며... 말이다.ㅋㅋㅋ
진한 대추차가 진짜 일품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 집이 맛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추차만이 가진 매력을 퍽 알아버린 듯싶다. 진한 대추차를 어른 남자와도 마시고 싶어졌다. 늙으셨으니 대추차 좋아하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우리 딸도 늙었네, 늙었어. 대추차 맛보고 좋아하는 거본께"
"아빠, 나 아직 젊어"
"그래, 그렇다고 치고. 진짜 아빠한테 할 말 있는 건 아니고?"
"우와, 없다고 했잖아! 다음부턴 아빠랑 밥 먹자는 소리 안 해"
"뭘 또 그만한 일로 삐지고 그라노. 아빠는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아빠 나 궁금한 거 있어"
"이것 봐! 본론이 있었고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뭔데?"
"아빠랑 엄마 결혼 반대 심했다면서 어떻게 결혼했어?"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노?"
"그냥, 글 쓰다가 갑자기 궁금했어"
"하도 장모님이 반대를 해서 니를 고마 가졌다"
"ㅋㅋㅋㅋㅋ그게 끝이야??"
"어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지. 아빠가 엄마랑 뱃속에 니를 끝까지 책임지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8살 차이다. 꽤 공부를 잘했던 18살 여고생이었던 엄마를 첫눈에 반한 26살 아빠. 엄마 역시 아빠와 사랑에 빠졌지만, 누구에게 환영받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렇게 아빠와 엄마는 헤어질 수 없었고, 아빠와 엄마 사이를 이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나였다. 나는 아빠 엄마의 사랑이 깨지지 않게 이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ㅎㅎㅎ

아빠와 짧은 점심시간을 보내고 사무실에 들러 마감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붕어빵 총각이 있는 걸 보고 나는 조금 돌아가야 했다. 이어폰을 꽂고 버스 정류장으로 걷다 문득 떠올랐다. 과거에 돌아가서 나와 어른 남자가 겨우 만났지만 엄마아빠처럼 환영받지 못하면 어쩌지. 하..
산 넘어 산이다. 어른 남자는 내가 구슬리거나 협박(?)하면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풉.. 그래, 내가 고등학생만 되면 어른 남자를 임신시키는 거야. 아니지, 내가 임신하는 거지. 어차피 나는 내가 가기 싫은 대학교에 입학할 것이 분명하니깐 그냥 임신을 해서 젊은 아줌마가 되는 거야. 아이가 어린이집 갈 때쯤 대학교를 가면 돼. 그땐 내가 가고 싶은 학교를 가야지.. 그래, 과거로 돌아가면 내 인생도 달라질 거야. 사랑도 하고, 빨리 작가로 성공해서 어른 남자를 주부로 만들어버릴 거야. 아주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