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만에 나타난 개자식
#목요일 오전 사무실
"굿모닝~~~~"
그를 사랑하는 일이 마지막일지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행복으로 가득 찼으니 말이다. 그 개자식이 또 날 찾아오기 전에는 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안에 고객님 와계십니다."
내가 출근하기 전에 와서 날 기다리는 고객은 두 종류다. 급한 일이거나 혹은 민원 고객이거나. 나는 얼른 가방과 가디건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말했다.
"고객님께 차 한잔 드렸어?"
"네, 과장님은 페퍼민트 갖다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고마워"
고객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샤넬 코코누와르 오드퍼퓸 향수의 진한 향기로 어떤 고객이 날 기다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개자식이다! 이 개자식과의 인연은 10년 전에 시작되었다.
#스물일곱
여자 나이 서른을 넘기면 똥값 된다는 말에 내 나이 스물일곱부터 모태솔로인 나는, 소개팅도 한번 해보지 못한 채로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맞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불안치료 중이었던 나는 점점 맞선에 적응할 때쯤이었다. 내 오랜 고객님 한분이 날 너무 좋게 봐주셨고, 며느리 삼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시고 심지어 '예비며느리'라는 호칭을 부르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사모님께서 우리 아들 한번 만나볼래?라고 하셨고,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거절을 하는 이유와 내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렸다. 겁이 좀 많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불안을 갖고 있었고, 결벽증이 심하다. 그래서 연애경험이 없어 매번 맞선을 보고 있지만 성과가 좋지는 않다. 그래서 사모님 아들과는 만남이 불 보듯 뻔하다. 날 좋게 봐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 일로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를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드렸다. 그럼에도 오실 때마다 당장 결혼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젊은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니 만나보라 하셨고, 보다 못한 짝지언니가 남자는 많이 만나봐야 된다며 함께 거들어서 어쩔 수 없이 만나보기로 했다.
그때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평거동 커피숍
강박이 있는 나는 늘 같은 장소에서 맞선을 봤다. 아마 그 카페 주인은 내가 매주 다른 남자와 차를 마시는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싶다.
맞선자리에서 내가 실수 하나를 하더라도 나의 부모님에게 화살이 날아가는 조금 부담스럽고 예민한 만남이다. 나는 매번 5분 전에는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모님 아들은 달랐다. 약속 시간이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내 시간이 이렇게 허비하는 게 도통 기분이 나빴다. 30분까지 기다려보고 오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려 마음먹었다. 예먼 시계만 째려보고 있는 데, 후줄근한 옷차림을 입고 들어오는 남자를 봤다. '설마 부모님이 소개해준 사람 만나러 오는 데 저런 차림일까?' 생각하면서 그는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이내 끊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나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저 오늘 만나기로 한.."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전화를 끊고 쭈뼛쭈뼛 나에게 걸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차 주문 하셨어요?"
"아뇨. 조금 있다 주문할게요. 혹시 ***사무실 **씨 맞으세요?"
"네 접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 음료 주문하고 올게요"
그가 일어나며 사모님께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엄마!! 엄마가 말한 아가씨랑 완전히 다르잖아!! 어? 그래. 알았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내용의 통화내용이었다.
"여러모로 너무 죄송해요. 어제 친구 전역해서 한잔 하는 바람에 과음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 꼴로 나왔네요. 하하. 소개팅은 몇 번 해봤는데 맞선은 처음이에요. 엄마가 맏며느리감이라며 원래는 저희 형한테 맞선 보러 가라고 했는데 형이 싫다고 해서 저보고 나가라고 해서 나오게 됐어요."
"아, 그럼 불편하시면 차만 드시고 일어나죠. 저도 사실 사모님께서 부탁을 하셔서 나온 자리였는데 그런 사정이 있는지 몰랐어요.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하셨겠어요"
"아니, 아니에요. 이왕 나온 김에 맞선 제대로 보고 가요. 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일곱입니다. 그쪽은요?"
"아! 저는 스물네살. 창원에서 체대 다니는 학생입니다. 군대는 얼마 전에 해병대 전역했고요! 이름은 ***입니다"
나보다 어린 남자였고 그리고 아직 대학생이라니, 뭔가 내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침묵을 깨고 그가 물었다.
"누나, 누나가 좋겠네요"
어차피 오늘 보고는 다시는 볼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냥 누나라고 편하게 불러라고 했다. 그리고 나보다 어리다는 점에서 남자로서의 매력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네? 누나는 좀.... 선혜씨라 부르면 안 되겠죠?"
"그렇게 부르고 싶음 그렇게 불러요"
하루만 볼 사이니 날 어떻게 부르던 전혀 상관없었다.
우린 그렇게 차를 마시는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그의 이야기였다. 군대 있었던 에피소드나 학교 생활이야기. 이야기 소재가 떨어졌는지 나에게 질문을 하는 어린 남자.
"엄마가 **씨 한 번도 연애경험이 없다고 하던데... 진짜예요?"
"그게 왜 궁금하세요?"
"그냥요. 제 주위에 한 번도 못 봐서 신기해서요"
"네, 못해봤어요. 못해본 이유도 사모님께 들으셨지 않아요?"
"네 대충요"
"차도 다 마신 거 같은 데 우리 일어날까요?"
"이제 어디 가요?"
"집에 가야죠"
"밥은 안 먹어요?"
"배고파요?"
"네! 밥 먹으러 가요"
대학생인 그를 스파크 내 차 조수석에 태우고 근처 야래향 중국집으로 향했다. 과음한 그에게서 술 냄새와 술 냄새를 덮기 위한 비싼 향수가 뒤엉켜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래, 이미 망한 맞선자리에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자 싶어 많은 양을 주문했고, 그런 나를 주문받는 사람도 어린 남자도 의아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체면 차리지 않고 그냥 내가 먹고 싶은데로 양껏 먹었다. 어린 남자는 나의 식성에 놀랜 듯싶었다. 그렇게 식사까지 마치고 경제력 없는 학생이 카드를 내밀었지만, 내가 계산을 하고 그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줌으로써 맞선이 끝났다. 맞선자리에서 식사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내가 데려다 준 적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나보다 어린 남자도 처음이었다. 이 사건이 그 개자식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와 맞선을 보고 나서, 많은 연락이 왔지만 내 입장에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거절을 분명 전했다. 그리고는 내쪽에서 더 이상 연락에 답하지 않았다.
얼마 뒤, 사무실에 사모님이 찾아오셨고, 자기 둘째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으셨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나의 회사 오너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게 아닌가? 회사 다니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사 점심시간에 함께 식당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사모님과 그 아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그렇게 넷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사모님께서 이 자리는 본인이 마련한 자리라며 양해를 그제야 나에게 구했다. 그러면서 사모님과 우리 회사 오너는 나를 앞에 두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맞선 봤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어린 학생은 맞선 날에 본인의 옷차림과 늦게 약속 시간에 도착한 일로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생각하여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나에게 연락을 하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 결국 성화에 못 이겨 다시 한번 만나기를 약속했다. 한번 더 만나보고 그때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넘어갔다. 그는 학생이었고, 나는 직장인이라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
한 여름이었고, 그날은 무척 더웠던 걸로 기억한다.
불편하게 카페에서 보지 말고, 하동 삼성궁을 산책 삼아 걷기로 약속하고 편안하게 옷을 입고 나오라 했다. 그리고 이날은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우린 너무 더운 시간대를 피해 2시에 만나 하동 삼성궁으로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카페에 들러 시원한 음료를 테이크아웃 해서 갔다. 더운 시간을 피한다고 해서 덥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소재가 얇고 하늘거리는 흰색의 짧은 트레이닝 세트를 입고 있었는데도 더웠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더운 만큼 목도 말랐고 물도 자주 마셨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나는 공중화장실에 가지 못한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가지 못한다. 참으려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고, 어린 학생에게 화장실 가고 싶은 데 갈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길래, 같이 가달라고 말했다. 쪽팔리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너무 급했다. 한 여름에 하동 삼성궁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를 여자화장실에 데리고 들어와 문 앞에서 세워두었다. 급한 볼일은 끝났고 어린 학생에게 손 씻고 나가겠다고 나가있어도 된다고 화장실에서 내보냈다. 손 씻고 어린 남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던 차에 땅이 고르지 않은 울퉁불퉁한 곳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짧은 바지를 입고 있던 터라 두 무릎이 완전히 다 까졌고 피가 나기 시작했다. 어린 학생은 많이 놀랜 듯했고 그렇게 삼성궁 전망대에서 내리막을 내려가는 데 무릎에 난 상처에서 피가 자꾸 흘렀고 아프고 쓰라렸다. 업어준다는데 바지가 너무 짧아서 안될 거 같다고 말했고 결국 어린 학생이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내 엉덩이 부분만 가리고 나를 그네 타듯이 안고 내려갔다. 그렇게 그의 상체는 알몸으로 나를 안고 삼성궁에서 내려왔다.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그도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차에 앉아서 나에게 덮어주었던 옷을 입었다. 날도 더운데 나까지 안고 내려와서 그런지 땀이 얼굴에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도 빨갛고 달아올라있었다. 더위를 먹은 건지 싶어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 정색하는 게 아닌가.
"만지지 마요. 괜찮아요!! 배가, 배가 좀 아파서 그래요"
"화장실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배가 아니에요. 출발할게요"
그렇게 출발했고, 우리 집 근처 제일병원에 주차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내 무릎은 내가 흘린 피로 다리가 엉망이었고, 흰색 옷에도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었다. 간호사가 우릴 보고 다가왔고, 나는 말했다.
"저 말고, 저 남자분부터 치료해 주세요. 배가 아프데요"
"아뇨 아뇨 전 괜찮습니다. 저는 안 해도 돼요."
그렇게 나만 치료를 받고 나왔다. 어린 남자는 휴지로 대충 이마에 땀을 닦았는데 휴지조각이 이마에 붙어있었다. 나는 그런 걸 절대 못 보는 사람인지라 차에 타서 그걸 발견하고 그걸 떼어주려 가까이 갔는데 나를 변태 취급 하는 게 아닌가?
"가까이 오지 말랬잖아요!!"
"이마에 휴지가... 붙어서요"
나에게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도 굉장히 기분 나빴다.
집 앞에 세워준 어린 학생은 내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고 내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무례한 행동만 잔뜩 해놓고 쌩하고 가버렸다.
이게 그 개자식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고,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 뒤로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2년 뒤에 내가 스물아홉 되던 해에 사무실로 찾아왔었다. 그때는 맞선을 더 이상 보지 않을 때였다. 내 옆에 첫 남자가 있었거든. 그때 나를 찾아왔던 이유가 대학교 졸업했다고 정식으로 만나자고 찾아온 듯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어린 남자를 확실하게 거절했었다. 그리고 그와는 완전히 끝이 났다. 그러고 8년 후 서른일곱에 또다시 회사로 찾아왔다. 밤낮으로 연락 오는 그가 너무 부담스러워 첫 남자에게 이야기했고 늦은 밤 전화 오는 개자식의 전화를 첫 남자가 받게 되었다.
"누군데 남의 여자한테 이렇게 전화를 계속하는 겁니까?"
상대방의 대화는 들을 수 없었다.
"싫다잖습니까. 업무적인 일은 사무실로!! 개인적으로는 연락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연락이 안 오겠지 싶었지만, 꾸준히 전화를 해대고 있다. 그리고 목요일에 또 나를 찾아왔다.
#목요일 사무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연락을 안 받으셔서 왔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밥 같이 먹자고요. 할 말이 있어요"
"그냥 이야기하세요"
"밖에서 이야기 좀 해요"
"아뇨. 전 할 말 없어요. 저 일 해야 돼요.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일하고 있는 사이 그는 가고 없었다.
개자식이 가고 없다는 소리를 듣고 눈물이 났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건지 진짜 알고 싶을 지경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그리고 내가 어른 남자를 만나고 있을 때 전화가 계속해서 왔다. 어린 남자는 끝까지 내게는 무례하고 무례한 개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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