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에는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부정하고 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이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이별이 주는 현실적인 감정들을 온몸으로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별이 주는 감정들을 끝끝내 마주하기는 싫었지만, 계속 피한다고 해서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좋은 결말을 주는 것이 분명 아니기에,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을 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 날, 그가 알아버렸다. 내 지독하고 슬픈 사랑에 그의 대답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다'였다.
하루종일 곱씹어 보았지만, 그의 대답에는 연민만 가득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의 사전적인 의미를 가진 그 연민 말이다. 그에 대답에서 연민 말고는 다른 감정은 없었다. 사랑을 하면 원래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자꾸 마음이 바뀌는 일이던가? 하루 전만 해도 그가 나에 대한 마음이 동정이든 연민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분명 그마저도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괜찮지가 않다. 그에게 매달려 내 사랑을 받아달래 구애하지 않았음에 그는 나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중년이상의 남자들은 "내가 난데" 하는 이런 꼰대 같은 강함과 본인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자기만족이거나 반대로 만족하지 않아서 생기는 포장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것일 테지만...
여하튼 그는 대체로 유순한 사람이다. 동글동글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다. 내가 본 그는 그랬다. 타인의 경계를 이렇게 빨리 풀린 적이 내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가 처음이다. 타인의 경계는 상대방이 안전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풀리는 데, 그에게서는 경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괴롭히고 싶다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사람이 그이다.
그런 사람에게 내 사랑을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착한 사람에게 내 절절한 사랑을 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연민은 내가 그에게 심어준 꼴이다. 결코 그에 대한 내 마음은 가볍지 않다. 그 마음을 이렇게 낱낱이 까발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부담이 되지 않길 바라는 건 모순이다. 내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 여지를 준 건 그쪽이다. 그러니 그쪽에서 자처한 마음의 부담은 그쪽이 책임지라고 말이다. 나의 짝사랑이, 외사랑이 진심이고 절실할지라도, 일방적인 사랑에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런 나에게 여지를 준 건 이번에도 그다.
그는 절대 모르겠지, 그를 향한 내 마음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버거운데, 착한 사람을 끌어들여 그 죄책감까지 내가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점점 내가 내 스스로의 목을 죄고 있는데도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나도 안다.
나는 밤마다 그를 베고 누워 눈을 감는다. 감은 눈에는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는 상상을 한다. 가끔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아난다. 그러나 나는 꼭 그에게 잡히고 만다. 결국 잠이 들지 않고 그리움으로 잔뜩 밝은 밤을 보내고 만다. 그를 품은 달빛은 오늘도 내일도 매일 나를 찾아온다. 밤이 그를 안고 올 테지만 나는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달아난다고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걸 안다. 어차피 밤과 함께 찾아오는 그는 그저 내게 남은 잔상일 뿐이니까. 그 잔상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나를 맴돌 예정인가 보다. 그래도 오늘도 이 긴 밤 최선을 다해 그에게서 도망해 보련다. 언젠가는 도망가지 않아도 찾아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그의 잔상마저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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