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30 후회

반응형

징검다리는 오늘도 실패.
언제쯤 건널 수 있으려나.
그가 끝에 서 있으면 가능할까?



#출근

오늘도 나는 옷 사이로 보이는 첫 남자의 흔적마다 파스를 붙이고 출근길에 올랐다. 강박이 있는 나는 출퇴근 길이 항상  같다. 절대 다른 길로 우회해서 가지 않는다. 불안이 강박으로 바뀐 것이므로 안전하고 편안한 길로만 다니는 루틴. 그런 내가 오늘 처음으로 다른 길로 출근했다. 편집장님이 있을 사무실 근처로 지나갔다. 그 길로 출근을 한다고 해서 그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길이라도 지나가야 될 것만 같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뭐라도 해야 내가 괜찮을 거 같았다. 차라리 몸에 흔적이 있는 게 잘 된 일이다 싶다. 이런 감정으로 그를 보러 갔다가 실수만 할게 뻔하니깐. 생각해도 끔찍하다. 공적인 시간에 공적인 장소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가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또 나는 뭐라 핑계를 대야 하나. 생각만 해도 복잡하다.

#사무실

또각또각. 왼발 오른발 구두굽소리에 발맞춰 걷으며 오른발로 내 자리로 도착하길 바라본다. 다시 시작된 강박. 불안하고 싶지 않은데, 하루에도 수천번 흔들리는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미 정확한 답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이 정해진 답을 받아들이기까지가 너무 버겁고 힘들다. 혹시나 내가 몰랐던 다른 답이 있는지 찾고 있는 내가 정말 못나 보인다.
짝사랑은 나 혼자 하는 사랑이기에 그나마 끝은 쉬울 거라 으레 짐작했다. 그 생각에 꼴좋게 뒤통수 맞았다. 혼자 하는 사랑도 함께하는 사랑 못지않게 마지막은 힘든 법이다.
이제야 후회한다.
이 소설에 그를 등장시키는 게 아니었다. 그를 남자 주인공으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내 마음이 호감이었을 때 긴가민가할 때 그냥 딱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딱 거기까지 했었어야 했다. 글로 쓰질 말았어야 했다. 내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내 마음을 확인하지 말아야 했다. 그를 좋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직업이 작가가 아니었어야 했다.

안된다는 게 눈에 빤히 보일 때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때는 포기해야 되는데 그는 포기가 안된다.
난 아직 어른이 아닌가 보다.
정말 나 혼자는 마무리할 수 없는 건가.
굳이 그를 통해 나한테 상처를 줘야 정리가 될 건가.

이대로 그를 다신 보러 가지 말까.
그래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라고 하고 와야 사람 된 도리겠지?
아닌가?

나는 그의 어디가 그리 좋은 걸까?
다른 사람과 뭐가 다른 거지?
왜 그런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하루종일 답도 없는 물음에 속이 갑갑하다.

"과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내 옆자리 직원이 내게 묻었다.

"아무 일 없는데, 왜?"

"아닌데요? 저번주랑 분위기 자체가 다른데?"

"좀 피곤한가 봐"

"그래서 입술에 수포 생긴 거예요?"

"응"


잠시 후 신혼여행 다녀온 회사동생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출근했다. 결혼식 이후 오랜만에 보는 친한 동생이었다.

"과장님, 살이 왜 더 빠졌어요!!!!! 잘 지내셨어요?"

"아니ㅠㅠㅠㅠㅠㅠ못 지냈어"


왜 눈물이 났는지 그땐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잘 지내셨어요 라는 인사말에 건드려진 게 분명하다.
내가 왜 우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기에... 내가 동생을 많이 보고 싶어서 감수성 예민한 내가 눈물이 터진 걸로 결론지어졌고 일단락되었다.
눈물 콧물 다 빼고 나니 속은 시원했지만, 팅팅 부은 눈으로 도저히 점심을 먹을 수 없었고 퇴근하겠다 말했다. 밥 잘 먹기로 소문나 있는 내가 밥을 안 먹겠다는 말에 다른 직원들이 무슨 일 있는 게 분명하다며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퇴근했다.
집에 와서 땀복으로 갈아입고 강변을 달렸다.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또 쓸데없는 생각들이 날 괴롭힐게 뻔해 몸을 쓰기로 했다. 나는 한달음에 그의 회사 앞에 멈춰 섰다. 보러 갈 수 없지만 그냥 그 앞에 도착했다. 그가 건물 안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약과와 우유하나 사 먹고 다시 또 달려 집 근처 도착했고, 나는 또 그에게까지 또 달렸다. 달릴수록 쿵쾅쿵쾅 뛰는 심장소리가 그를 향해 뛰는 심장소리 같아 더 애달픈 느낌에 달리기를 멈췄다.
보고 싶다. 그냥 내가 쓴 글 챙겨서 그에게 가버릴까? 부딪혀서 생긴 멍이라고 하면 그는 믿어줄까? 나에 대해서 모르는 그는 단면적인 모습만 보고 문란하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그럼 안되지. 그를 보러 가면서 내 몸에 다른 남자 흔적도 함께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젊었을 땐 몸에 멍도 빨리 없어졌던 거 같은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더 느려진 거 같아 속상하다.
상처가 옅어질 때까지 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너무 보고 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