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맥, 치킨과 맥주
파막, 파전과 막걸리
소삼, 소주에 삼겹살
소청, 소주에 청포도??
어두운 밤, 밝은 달빛, 그 아래 떨어지는 벚꽃잎들.
밤이란 것은 모든 것을 새로운 모습으로 덧 씌운다. 날 밝은 하늘 아래 선연히 드러나던 것들이 가려지고, 새로운 필터를 씌운 듯 듬성듬성 묻어난 어둠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도 아름답지만, 칠흑 같은 어둠아래에서 조명 불빛과 가로등에 의지한 벚꽃도 놓치기 아까운 하나의 매력이다.
슬리퍼 끌고 집 앞 편의점에 가던 길이었다. 자정이 넘은 조용한 거리 위, 밤의 벚꽃이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선선한 밤의 공기, 나 홀로 멈춰 서 있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고 머무르게 했다. 검은 봉지는 손목에 걸어두고,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다 결국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한창때의 벚꽃이 아닌, 이미 벚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힘없이 흩날리는 벚꽃을 멍하니 보고서.
그리고 곧이어 생각에 잠겼다.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누가 보면 어쩌지..'
'늦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집 앞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는 배짱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정이 다되어가는 시각이었고, 밤의 벚꽃에 이미 마음이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검은 봉지에 있던 팩소주와 청포도 사탕을 테이블에 꺼냈다. 풉, 술을 못 마시는 나에게 환상의 조합이다. 소청, 소주와 청포도 사탕. 씁쓸하고 쓴맛의 소주와 달콤하고 달달한 청포도 사탕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고, 혀끝에서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묘한 맛을 극대화시켜준다.
자정을 지나는 시각이었지만, 이따금씩 차들이 다니는 도로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배짱은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가 마음 편히 소주를 마시는데 일조했다. 검은 봉지로 팩소주를 감쌌다. 고로 타인은 내가 소주를 마시는지 모르는 일이 되는 것이 된다. 사탕을 입에 넣고 양볼로 옮겨가며 사탕이 녹기 시작하면, 빨대로 소주를 힘껏 빨아들인다. 달달한 입속은 갑자기 들어온 소주에 쓰디쓴 소주의 맛을 최고치에 달하게 하고, 목구멍으로 삼켜진 소주의 쓴 맛은 침 속에서 녹는 사탕에 그 단맛은 최고치에 달하게 한다. 알싸하고 달달한 기분, 이 조합이 나를 끝없이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단점이 있다면, 조금 빨리 취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 극강의 쓴맛과 극강의 단맛 탓인가.
낮동안 빛을 받은 벚꽃들은 저 스스로 빛을 내는 양, 흰 빛을 더 도드라지게 뿜어내고 있다. 밤의 벚꽃은 어둠의 대조 속에서 오히려 꽃들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만다. 작은 탄성을 자아내는 광경이다. 나는 낮의 벚꽃보다 밤의 벚꽃이 더 좋다.
누군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인기척을 뒤에서 느껴졌다. 혹여나 낯익은 동네 사람일지도 모르기에 신경이 쓰였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게 누구든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깊게 찔러 넣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열어 홈캠으로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를 켜두고, 마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내 두 눈은 꽃비로 향했고, 내 손은 검은 봉지를 감싼 팩소주를 마시는 일.
잠시 뒤 그 누군가는 라면냄새를 풍기며 내 뒤 테이블에 앉았다. 젓가락 반으로 갈라 비비는 소리에 고등학생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캔맥주 따는 경쾌한 소리로 누군가는 어른이었다.
까만 배경에 하얀 꽃잎들.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게 만들었다. 밤의 벚꽃에 취해 너무 오랫동안 바라본 나는 무심결에 내뱉어지고 말았다.
"윽 , 추워"
술을 마시면 열이 올라 양볼이 빨개지는 데 왜 이렇게 추워지는 걸까. 하여튼 그 덕에 뒤에 있는 라면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어? 아기 엄마였네요?"
"아.... 안녕하세요"
"네, 이 시간에 뭐 하세요?"
"뭐 사러 나왔다가 벚꽃이 너무 예뻐서 보고 있었어요. 그쪽은요?"
"라면 먹으러 나왔어요"
"???"
"아아! 거실에서 와이프랑 둘째가 잠들어서 깰까 봐 나왔어요"
"아아, 다정하시네요"
"아닙니다. 둘째가 귀가 엄청 밝거든요"
"아... 그럼 드시고 들어가세요. 아침에 봬요 ^^"
"벌써 가시게요? 아직 소주 남아있는 거 아니에요?"
"에???? 소주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ㅡ^ 여자 혼자 검은 봉지에 싸서 마시는 게 뭐겠어요? 우유겠어요? 에너지 드링크겠어요? ^^"
"하하...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이렇게 마시면 아무도 모를 거라는 1차원적인 생각만 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아뇨 일은 무슨요.. 그냥 벚꽃이 예뻐서요"
"근데 왜 소주만 드세요?"
"소주만 마시는 거 아닌데? 안주 있잖아요. 사탕^^"
"네?? 그렇게 마시면 맛있어요?"
"전 너무 좋더라고요 ^^"
"취하신 거 아니죠?"
"넵. 이만 가봐야겠어요"
"안 취했다고 하면 취한 건데?"
"사실 조금 알딸딸해요. 술 못 마시거든요"
"얘들은요?"
"자요"
"잠시만요 같이 가요"
"아뇨 천천히 드세요!!!!"
"찜질방이 있어서 불량청소년들이 요새 많더라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검은 봉지에 있는 사탕 하나를 입속으로 밀어 넣고 편의점 앞을 기다렸다. 아기 아빠도 검은 봉지를 손에 들고서 나왔다.
그렇게 1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같이 걸었다.
"소주랑 청포도 사탕, 너무 궁금하네요"
비닐봉지를 흔들며 빙그레 웃는 아기아빠.
"소문내지 마세요. 너무 맛있으니까 ㅎㅎ"
입안에 사탕이 있어 말하는 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나 보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아! 사탕 하나 드릴까요?"
"아뇨. 샀어요"
"아, 네"
"글 쓰세요?"
"네? 저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들이 엄마 작가라고 엄청 자랑하던데요?"
"아... 네. 유명한 작가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글 쓰는 걸 좋아해요"
"멋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 봬요"
"네 아침에 뵙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저 그는 내 나이가 궁금했나 보다. 나의 직업도 그냥 궁금했나 보다 생각하련다. 아기 아빠는 무례하지 않지만, 점점 가까워짐이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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