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압된 욕망을 벗어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처럼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 태어날 때 혼자이지만, 그 이후 사회적 관계를 통해 무리를 이루며 산다. 그러면서 사회가 정한 규범 안에서 도덕과 윤리는 중요한 기준과 역할이 되고,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며 살아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충동을 억누르게 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 법.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성을 숨겨야 한다는 교육을 대놓고 받진 않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 니체의 첫 책,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본질을 대표하는 인간의 대비되는 마음으로 설명된다. 원래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아폴로는 이성의 신으로 알려져 지혜, 질서, 양심, 사랑, 균형으로 표현되는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 술의 신으로 본능, 열정, 충동으로 표현되는 신이다. 오늘 디오니스소스의 편에 서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무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둔다 해서 숨길 수 없다. 나의 디오니소스 충동을 일으킨 사람은 어른 남자이다.
사무실이라는 장소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다. 그 이유는 회의실에는 문이 없다. 늘 열려있다는 소리다. 누구에게 언제든지 들킬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는 회의실은 쾌락을 증폭시키는 위험 요소다. 단순히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배출하는 신체적 결합의 행위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도덕과 윤리 그리고 금기를 넘나드는 행위일수록 짜릿한 쾌감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장소에서 내가 사랑하는 어른 남자와의 관계는 치명적이다. 게다가 나는 성에 대한 경험이 없는 편이다. 그저 합밥적인 관계의 첫 남자와 자신의 유전자를 전파하는 종족 번식의 본능만을 따를 뿐이었다. 그런 내게 어른 남자는 그동안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남자이다.
#지배라는 유희와 언어유희
예의 바른, 친절, 다정, 올바른 이런 이미지의 수식어가 어울리는 남자에게 나의 몸을 맡기고, 상대는 내게 몸을 맡긴다. 생판 남이라면 남인 남자에게 나의 몸을 맡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엄청난 위험이다. 그 어렵고 위험한 일이 그에게만 쉬워지는지는 이유는 단연코 '사랑'이라는 힘이 뒷받침해 준다. 그와의 관계는 상대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만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배하고 싶어 한다. 이 관계에서 나는 '지배'를 통해 더 깊고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싶어 한다. 나 혼자 독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서만 한없이 착할 수 밖에는 내가, 착하고 올바른 그를 오롯이 지배하여 기만적인 관계를 바라고, 바른 이미지의 그가 날 지배했으면 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원하는. 그동안 그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그를 끊임없이 지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도 나에게 그리해 주기를. 복종은 또 다른 해방이므로. 서로 무례함 속에서 친밀함이 더 돈독해지기에. 상대가 뭘 해도 다 받아들이겠다는 건, 억압이 아닌 허락이며 승낙이고 사랑의 다른 말이다. 그건 내 쪽에서는 사랑이 기반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마 나는 직업의 특성상, 이성의 틀을 벗어난 창조적, 예술적이어야 하는 디오니소스적 원리가 어른 남자를 만나 대입된 듯하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나도 모르게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긴 건, 내 모든 걸 타인이라는 어른 남자에게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으니까.
'하고 싶어', '넣고 싶어'라는 말을 내 입에서 뱉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말이 되어 나가기까지 결코 쉬웠으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에도 내뱉어진 건, 분명 그를 향한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그뿐이었으니까. 그에게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하늘이 두쪽이 나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원망하지 않는다. 그럴 자격이 있으려나... 하나, 지치고 힘이 드는 건 사실이다.
모험 심리
사무실이라는 색다른 환경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
날 대하는 단면적인 모습만 보아도 그의 다정함은 불 보듯 빤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고 더없이 다정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이치겠지. 그에게는. 지루하고 익숙한_ 뻔한 삶에서 그는 내게 모험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금기에 금지된 것들이 주는 신선함을 짝사랑하는 상대가 내게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거부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 아마도 분명 없을 것이다. 가장 익숙한 내 몸으로 가장 낯선 장소라는 회의실에서 그 경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나는 그와 사랑을 한다. 그 속에서 익숙한 내 몸은 더 이상은 익숙하지 않게 된다.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종족 보존을 위해 하는 사랑에서 진짜 '사랑'있어야 함을 알아버렸다.
의무에서 쾌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유년 시절 가정과 교육기관에 있다. 그래서 나 때에는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만 그런 건 지도 사실 모른다...)
여자의 몸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때만 해도, 친척집에서 뉴스를 통해 나온 성에 대한 사건과 사고들은 여자의 부주의로 취급했다. '젊은 처자가 밤이슬 맞고 다니니... 쯧쯧 쯧 세상 말세다', '저렇게 벗고 다니니 그런 사달이 나지' 등과 같은 말들에는 죄다 문제의 발단은 여자 쪽이었다. 항상 조심해야 했으며, 저런 일이 내게 생기면 평생 낙인을 찍고 시집을 가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처럼 살아가야 한다 생각했었다. 그 결과 마흔을 곧 앞둔 나는 합법적인 관계에서도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의무 방어전일 뿐인 행위였다. 그저 자식을 번식시키기 위해 배출을 도와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감. 딱 그뿐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육체적 관계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심리적인 편견이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한 순간에 많이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30여 년을 살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적어도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감에서 '완벽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플라토닉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나를 그가 변하게 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그를 향한 '사랑'만은 감춰야 한다. 나로 인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그 외에 모두 사랑이 기반이 되는 그와 엮이고 싶은 솔직함만이 존재한다. 그 앞에서는 거짓과 위선 따윈 없다. 그것이 그를 향한 동경의 대한 표현 방식이다. 육체적인 쾌감을 쫓는 행위 그 이면에는 그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한 번이라도 없었던 적이 없다.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가 닿을 수밖에 없나 보다. 나의 모든 상황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집고 싶었다. 그때 그 공적인 첫 만남이 어른 남자가 아니어도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었다. 인간의 본질 따위를 논하며 작가라는 직업을 내세워 멋스럽게 나는 그가 아니었어도 그때 어느 누구든 사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몸정이 그리웠단 반증이었다'라는 끝맺음을 마무리하고, 그와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나, 분명하게도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고백해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글을 쓰면 쓸수록 그에 대한 고백이기에 이민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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