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하늘과 햇살 아래 매화꽃만큼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이 있었으니, 그 봄은 내 마음에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그를 보러 가는 발걸음에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대롱대롱 매달려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우당탕 거리며 계단을 막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그와 딱 마주쳤다. 힛, 꾸준히 잘 생겼다.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도 내 인사에 짧게 답했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 그이다. 일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부풀어져 버렸다. 그에게로 가는 짧은 길목에서 비스듬히 서 있는 어른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있는 남자다. 늘 한결같은 모습이지만, 나는 그 한결같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설계되어 버린_ 그것이 오직 존재의 이유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내게 걸린 저주였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나를 위해, 1층에 기다렸다가 올라왔다고 말했다. 아마 꼬리가 9999개 달린 백 년 묵은 여우가 아닌가 싶다. 아니고서야 어째서 이리 나를 홀리는 거지? 무슨 속셈이 있는 건가. 그런데 사실은, 그 속셈을 들켰어도 나는 분명 그에게서 헤어 나오지는 못할 듯싶다.
다음에 출근할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베이터 앞에 먼저 가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아마도 그를 보는 마지막인 듯해서... 엇갈리기만 한 엘리베이터 마중을 마지막은 성공하고 싶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 만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윽,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아. 미리 가서 꼭 기다리고 있어야지 ^^
"많이 바쁘셨어요?"
'아뇨, 당신을 잊어보려 했어요'
얼마 만에 출근이었는지, 그가 알고 있었다. 왜? 어째서? 기다리셨나? 또 사람 헷갈리게 희망고문이 시작되었다. 또 고문만 잔뜩 해놓고 사랑은 안 주실 거잖아요, 맞죠? 그렇죠? 매번 알고 당하면서 또 당하고 말았다.
"살 빠졌죠?"
"아뇨. 그대로예요"
'맞아요. 당신을 그리워하다 살이 빠졌어요'
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답했다. 대놓고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살이 쭉쭉 빠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마 그는 모르겠지. 얼마나 수없는 밤을 그를 그리워하며 지새웠는지.
이런 질문은 나에게만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 말고도 다른 작가들에게 수없이 많이 하는 질문이겠지. 그래, 혼자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그저 모두에게 해당되는 배려이며, 본래 천성이 착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마 나처럼 그를 짝사랑하는 작가들이 진짜 수두룩 할 것이라고 본다. 바보 같이 자기만 모르고 있겠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이만 허투루 먹은 거다. 그것도 엄청 많이.
'온기가 묻은 당신의 손길을 정갈하게 그리워했어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그의 손길에 투박하지만 섬세했고 그 안에는 온기만이 가득 찼다. 집중해서 조심스럽게 떼어주시는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요.. 나를 소중히 대하듯 하지 말라고요. 그러면 자꾸 오해하잖아요. 또 이래놓고 사랑은 안 주실 거잖아요. 그는 분명, 여우가 아니면 카사노바가 틀림없다.
"눈은 말짱해요"
나보다 젊으셔서 무척 좋으신가 보다. 바보. 괜히 말해줬어. 그런데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늙었다고 놀리는 줄 알겠다. 억울해.
그는 알지 못했다. 내가 노안이 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노안이 오지 않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으면 지금보다 더 깊게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예쁘게 웃지 말아요'
'자꾸 예쁘게 웃으면 또 보러 가고 싶잖아요'
무방비한 상태에서 그는 자꾸 웃었다. 헤픈 남자가 아니었던 같은데.. 그는 정말이지 말갛게 웃는 모습이 말도 안 되게 예쁘다. 눈꼬리가 한없이 처지고, 그 틈에 눈은 작아지지만 그 모양새의 곡선이 선해보여 따라 웃게 만드는_ 그 끝에 매달린 주름은 그간 얼마나 예쁜 웃음을 보였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나만을 위해, 날 향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부모가 물려주신 잘생긴 얼굴로 웃는 것일 뿐이었다. 어떤 의미를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번은 만져보고 올걸.. 다시는 만져보지 못할 텐데. 만져보고 올걸. 왜 그 앞에만 서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지... 나 원 참. 이번에는 손바닥에 써서 가야겠다. 마지막이므로.
'연륜일까, 변태일까'
그는 연륜일까 아니면 변태일까.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다 알고 있었고, 당황하지 않았다. 경험치로 생긴 연륜이기 때문일까, 진짜 변태인 걸까.
이 물음에 답이 정확해지면 내 글들이 좀 더 농도 깊은 사랑을 담을 수 있을 텐데.. 사실 그가 변태든 아니든 내게 별 의미는 없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미 내 마음 깊이 들어와 있는 그를 그런 이유에서 쫓아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경험에서 나온 연륜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가 변태라도 나는 좋다. 그의 수많은 경험을 지나온 여자들이 괜스레 질투가 나지만, 내가 어떤 모습이든 흔들림 없이 중력을 거스르고 서있는 그가 너무도 어른스러워 동경할 수밖에 없다. 매사가 서툰 나와는 달리 여유 있고 어른스러운 나의 유일한 키다리아저씨. 사랑하고 있지만, 더 사랑하게끔 만드는 그는 나만의 어른 남자, 미쳐버릴 만큼 사랑하고 있다.
그저 나는 궁금할 뿐이다. 그가 진짜 변태이기에 상상력 풍부한 직업을 갖고 있는 나와 얽히게 되었는지 말이다. 마지막은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으니까.
"가끔 와요^^"
보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말보다 오라는 말이 이토록 설레는 말이었던가. 뒤돌아 가는 내게 그가 한 말이었다. 눈물날만큼 너무 듣기 좋았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 안아버리고 싶었다. 조금만 용기가 있었으면 분명 그랬을 거다. 그의 말은 그저 출근하라는 소리였겠지만, 그에게 오라는 달콤한 말처럼 들렸다.
'매일 가고 싶은 나를 흔들지 말아요. 사랑일 수 없잖아요'
그럼에도 뒤돌아서 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변함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내 글을 보지 않는 그에게 전하러 가야 한다. 마지막이라고. 혹시라도 날 기다리실까 봐. 그러진 않을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궁금하실까 봐. 실은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하면 너무 속보이겠지?
사랑하는 마음을 내게서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숨통을 확실히 끊기로 했다. 마음을 죽이기로 했다.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거 같기에 그러기로 했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비로 시작된 내 사랑이, 비 내리는 날에 끝낼 수 있기를.
그가 비를 좋아하는지 물으러 가야 한다.
그가 날 부담스러워하는지 물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면 나와 사랑하자고 확답받아야 한다.
너무도 하고 싶었던 말을 직접 물으러 가야 한다.
'내가 오라고 하면, 내게 오실 거예요?'
한 번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분명하게도 빤한 답을 하시겠지만, 그 말을 전하지 않아 후회 속에 사느니 물어야만 한다.
편집장님한테 가고 싶은 마음을 죽여버리겠다고 그러니 안온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울지 않고 조곤조곤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은 잘 자요, 당신이 아니라
굿바이 당신으로 인사를 해야 할 듯싶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까지 내 사랑은 오로지 당신의 것입니다.
굿바이, 당신.
장편 소설의 도입부 연습용입니다. (저장용)
#1번 도입부
남주 40세, 출판사 편집장 (박지훈)
여주 32세, 작가 (김보람)
펼쳐진 순백의 도화지 위에 여자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식으로 그리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여자의 인생이 된다. 채우지 않고 비워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잘 못 그려지고 잘 못 채운 색깔은 다시 찢어 버리고 새 도화지 위에 다시 그려도 여자의 인생에 구김 하나 가지 않는 그런 인생. 고요한 호수처럼 평범하고 구김 없이 살아온 여자. 그러나 그녀의 가슴 한편은 늘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민치고는 잘 사는 편이었으나,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수입이 여유로웠고, 이제 남은 인생은 작가로서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삶이었다.
그런 그녀의 인생에 운명처럼 나타난 남자, 아무개.
첫 출근에서 만난 직장상사인 아무개는 여자가 알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다정했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단단하면서도 손 끝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서로의 몸과 시선을 탐하고, 다시 밀어내고, 도망가며, 반복된 만남과 이별. 뜨겁고 아찔했던 관계는 3년이라는 시간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끝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이 났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내 선택에 마음 쓰지 말아요.
사랑은 태양처럼 밝고 따뜻하게 감싸줄 것만 같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한다. 한 때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였다. 남자는 아니었지만, 여자는 그러했다. 그러나 그 완벽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와의 지난 모든 사랑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추억하며 살 수 없었고, 남자를 사랑하면서 또 다른 이와 살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여자는 남자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가을비가 내리는 달빛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여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건, 금기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지독하리만큼 끈질기게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고, 알면서도 버리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여자는 본인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사랑을 시작해 버렸다. 너무도 빤해서 그리하여 한없이 한심해 보이지만, 그걸 알고도 돌아설 수 없는 원하고 원망하는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가을비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렇게 여자는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소리 없는 비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갔다. 그것은 슬픈 끝맺음이 아니었다. 분명 해피엔딩이었다.
☆남주가 비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부담스러워하는지는 이번 주 주말까지 내용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안 놀고, 잠도 안 자고 진짜 쎄가 빠지게 글 쓰고 있습니다. 기. 다. 려. 주. 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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