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48 시절인연이었어요

반응형



#사랑 빼면 시체

당신과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 익숙한 공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내 내 머릿속에는 당신과의 추억으로 가득 차고 말아요. 당신을 향한 사랑은 여러 종류의 향기를 내게 남기고 갑니다. 아마 그 향기의 주인은 언제까지나 당신일 것이에요.

당신은 내게 사랑입니다.
나에게 사랑은 당신입니다.

'당신과 나는 시절이연이었다'

이 문장으로 소설을 끝마치면 이 소설은 슬픈 끝맺음은 아닐지도 몰라요.  해피앤딩일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당신도 나를 한 번은 사랑해야 가능한 결말이지만요. 혹여나,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아시려나요?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예요. 오해 말아요. 나는요, 종교가 없어요. 그런데 종교책을 젊었을 때 어마어마하게 많이 읽었어요. 한번 빠지면 지독하게 그것만 파고들어 제대로 알아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지금은 당신에게 지독히도 빠졌지만요.
무튼,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시절인연은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이에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고,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만날 사람은 만나고, 만나지 않을 사람은 안 만난다는 것.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직업병이긴 하지만, 이런 문장을 보면, 노트에 적고 곰곰이 생각해 봐요.
시절인연, 애달픈 마음은 뒤로하고 현실을 인정해야 하죠.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린 시작이 어긋났잖아요. 시작이 어긋나면 끝도 어긋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의 그리움에 사무쳐 허우적 대고 있는 나를 지나고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반짝이던 모든 사랑은 이미 그 가치는 충분할 거 같아요.
지금은 당신에 대한 사랑이 현재진행형이기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망연자실하고, 가끔은 나는 왜 그들에게 가혹한 운명을 선사하는지 따져 묻기도 해요.

"신이시여, 정녕 꼭 그래야만 했나요...?"

이라고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있고...(당신과 나처럼)
한 시절 함께하는 인연도 있고.. (당신과 나처럼)
한평생 같이 하는 인연이 있음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당신과 평생을 같이 할 인연은 이번 생에는 틀린 듯하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고 싶습니다. 한 시절 함께하는 인연이고 싶습니다. 그마저도 안된다 하시면, 그럼 딱 하루만이라도 당신과 내가 인연이고 싶어요.
쓸데없는 말을 또 한거석 적어놨지만요, 사실하고 싶은 말은 정확하게 한 문장이에요.

하루라도 당신의 사랑을 내게 주세요...



<남주여주 데이트는 안 하나요>
<사무실 말고 둘이 데이트도 써주세요>
<남주는 과연 비를 좋아할까 싫어할까>
<작가님 좋으시겠어요. 비 와서요>
<이미 완결난김에 남주여주 밖에서 데이트 찐하게 한번 가시죠>

#비예보가 있던 어느 날

"편집장님, 저... 밖에서 한 번만 만나주세요ㅠㅠ"
"(끄덕끄덕)"


큰 기대 없이 던진 말에 긍정으로 답하는 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저랑 밖에서 본다는 거... 맞죠?"
"네^^ 밖에서 한번 봬요"
"네!! 너무 좋아요"
"그럼 연락은 어떻게...?"
"문자 주세요^^"
"연락드릴게요"


그렇다.
그를 사랑하는지 1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그 흔한 연락처 하나 모르는 그런 관계, 아는 사이라고 보기보다는 모르는 사이라고 보는 게 더 맞는, 그런 관계가 그와 나의 관계다. 그 마저도 나는 좋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어찌나 행복하던지, 어찌나 설레던지 결코 숨길 수 없는 마음에 곧장 집으로 향할 수 없었다. 작은 키를 숨기고자 신은 구두였지만,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모든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한 번도 산책길이 달라 보이던 적이 없던 뻔한 길이 충분히 달라져있었다. 사랑으로 뒤덮여있었으니깐. 아무도 없는지 몇 번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고, 결국 나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길바닥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두 팔을 공중에 허우적거리며 휘젓고 말았다. 큭,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여 큰 용기를 내어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언제 할지 모르는 편집장님 연락을 주야장천 기다리는 건,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가며 나를 뜨겁게 달구고, 때론 차갑게 식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편집장입니다. 이번 주 화요일 오후에 뵐 수 있을까요?>

언제 올지 모를 그의 연락에 휴대전화를 올려두고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문자 하나에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할 일인가. 벅찬 마음에 사무실에서 업무 중이던 나는 "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직장동료들은 내가 로또라도 된 줄 알았다고 했다.

<네! 좋아요^^>
<몇 시에 어디서 볼까요? 전 12시 이후로 괜찮습니다~>
<그럼, 12시에 봬요! 어디서 봬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
<제가 작가님 있는 쪽으로 가도 됩니다^^>
<오늘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작가님 좋아하는 ㅎㅎ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로 할께요^^>
<그럼 제게 와주세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창가로 자리를 옮겨 그와 주고받은 문자를 곱씹어 보며 연신 큭큭 거렸다. 마치 행복과 사랑이라는 막이 나를 두텁게 둘러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창밖으로는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내 인생 첫 데이트
일기예보에 비가 잡힌 어느 날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를 보는 날, 내게는 그 어떤 날보다 중요한,

<작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전에 편집할 게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빨리 와요ㅠㅠ>
<넵 혹시 늦게 되면 연락드릴께요^^>

분명, 문자로 주고받는데, 왜인지 음성지원되는 느낌일까. 그가 보내는 이모티콘을 보면 그의 눈매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웃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문자내용은 음성지원이 되어 그가 읽어주고 있었다. 이것을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인 것이다.
사실, 아침에 여간 부산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에게 분명 예쁘게 보이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었고, 재주도 없었다. 그럼에도 출근 준비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그 콧노래는 오랫동안 끊기지 않았다, 분명하게도.
몸은 사무실에 앉아있지만, 도통 일이 잡히지 않았다. 난생처음 하는 데이트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설레고 박찬 일인데, 그 대상이 내가 짝사랑하는 그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첫 데이트에 관한 정보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검색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익명으로 글을 올려 도움을 청했다. 많은 댓글이 달렸다.

점심- 영화- 카페
이 순서가 첫 데이트의 공식처럼 달렸다. 그리고 대댓에 요즘엔 이렇게 데이트하지 않는다며 서로 논쟁하는 댓글도 한참 달렸다.
그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공식이었다. 그 공식에 대입했다간 틀린 오답만 나올 것이 분명했기에..
내 눈에 들어온 댓글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첫 데이트에서 모텔에 갈 순 없잖아요-

이유를 물을까 말까 고민만 하던 차에 그 페이지에서 뒤로 나가기 한 후 다시 그 창을 열었다. 대댓이 달려있었다.

-첫 데이트에서 여자가 모텔에 가자고 하면.. 그 여자는 볼장다봄. 걸러야 됨-

누군지 모를 누군가의 댓글의 설명에 이유 없이 감사함을 느꼈다. 그에게 그렇게 보이기는 싫으니깐.
무슨 시간이 이리도 안 가는 걸까.. 직장동료들은 대식가인 내가 배가 고파 점심시간만 기다리는 먹보인 줄 알고 자꾸만 먹을 간식들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궁금증으로 나를 다시금 익명으로 대댓글 쓰게 만들었다.

-첫 데이트에서 여자가 대식가면요...?
-30대 후반에 첫 데이트고, 대식가??? 님 이뻐요?
-아니오..
-님, 조금만 드세요

뿌앵 ㅠㅠ 이 새끼, 익명이라도 내게 이렇게나 큰 상처만 주고 더 이상 답이 없었다. 썅.
결국, 나는 그 상처 준 댓글의 말을 듣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약과 30개와 콜라를 사 왔다. 입이 짧은 그에게서 엄청난 양을 먹었다가는 분명 돼지라고 생각하셨기에 말이다.

"징징징ㅡ"


모르는 전화로 전화가 왔다. 이상하게 안면이 있다?
그였다. 맞다. 저장을 할까 말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다면 뭐라고 저장해야 할까. 그는 내 번호를 저장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나는 저장하지 못했다.
처음 통화였다. 그와 사적인 통화는 처음이었다.
어쩜, 핸드폰 너머 들리는 음성까지 이렇게 달콤한 걸까. 끊고 싶지 않았지만, 내게는 대화를 이어갈 어떠한 명분을 찾지 못했고, 종료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전화를 끊고 빛의 속도로 퇴근 준비를 했다.

"우리 먹깨비 과장님, 배 엄청 고프셨나 보네"
"ㅋㅋㅋㅋ 뭘 먹으러 가길래 그리 신났노 ㅋㅋ"
"소 한 마리는 먹을 기세 ㅎㅎ"


사무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한 마디씩 던졌다. 평소 같으면 눈을 흘기며 하나하나 답을 해줬겠지만, 이미 내 몸과 마음은 그에게로 가 있었기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빠빠이~~~~~"

짧고 굵은 인사를 남기고 우산을 챙겨 들고 그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단숨에 뛰어내려 갔다. 혹시나 먼저 와 기다리실까 봐, 그 기다림에서 외로우실까 봐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갔다. 때마침, 막 도착하는 차가 보였고, 나는 또 한 번 뛸 듯이 기뻤다.

"많이 기다렸죠? ㅠㅠ"
"아니요^^"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한없이 좋았다. 출발한다고 했을 때 시간과 도착한 시간을 봤을 때 분명 기다리고 있을 날 위해 서둘러왔을 그가 상상이 되었다.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뭘 먹고 싶냐고 묻는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얼굴만 봤다. 곧이어 나는 조금은 조용한 곳을 떠올려냈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비가 올 듯 말 듯 거리며,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다.  
사무실이 아닌 밖에서는 보는 편집장님이 낯설었지만,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음에 일단 굉장히 행복했다.  길고 짙은 눈매가 한층 더 눈꼬리를 늘어뜨려 선한 인상을 띄고, 콧날은 곧고 정교하며, 조그만 입술사이로 숟가락을 밀어 넣는 남자를 앞에 두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머릿속 어지럽히는 마음에 합리화시켰다.  

"편집장님 만나기 전에 약과 20개 먹고 왔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사실 30개 먹었는데 왜 스무 개만 먹었다고 했을까 ㅋㅋㅋㅋㅋㅋㅋ
창밖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마주 보고 밥을 먹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아니,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러면 영원히 이 시간에 갇혀살 수 있을 텐데 생각했다. 길지 않은 그와의 식사시간이 끝이 났다.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과 빈틈없이 몸으로 얽히고 싶어요'

그러나, 내뱉을 수 없었다. 익명의 댓글이 떠올랐으니깐..
그렇게 그와 나는 빗속을 달렸다. 그마저도 나는 무척이나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차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내 심장은 같은 속도로 움직였고, 당장이라도 핸들만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다 내 쪽으로 옮기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생각해 낸 곳은...

"카페 갈까요..?"
"저... 차 못 마셔요. 화장실 가야 해서요...ㅠ"


데이트를 해보지 않아, 뭘 해야 할지 어딜 가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수없이 글 속에서 사랑을 만들어내는 작가임에도 막상 내 데이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차 안에 이대로 있어도 좋아요..'

사실 거짓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빗속에서 둘만 있는 차 안
공간도 몹시도 좋았다. 그러나 습한 날씨에 그의 향기를 잔뜩 품고 있는 차를 질투하게 되었다. 그의 살냄새가 맡고 싶어졌다.

'살냄새 맡아보고 싶다고 하는 건, 첫 데이트에서 괜찮은 대사일까..? 실례일까...?'


그가 허락한다면 운전하고 있는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목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향기가 차에 모조리 베이는 게 아까웠다. 말해볼까 말까... 변태라고 생각하시려나... 마음도 조급해져 갔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건 그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깐...

목적지 없이 배회하다 결국은 그와 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장소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첫 데이트가 맞지만, 그와 나는 일반적인 데이트가 아니었기에.. 둘만의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차 안에는 더욱 굵어진 빗소리가 울려 퍼졌고, 창밖으로는 빠르게 와이퍼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남자와는 처음 가는 곳이었다. 티 나지 않게 행동하려 했건만... 떨리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나는 그와 하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결국 알지 못하겠지.

둘만의 공간은 빠르게, 어색하고 뻘쭘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싶었다. 목덜미에서 나는 살냄새가 몹시도 맡고 싶어 졌으니까..
그가 씻으러 가고 멍하게 창밖을 보았다. 봄비치고는 제법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비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분명 비를 내게 데려온 것이라고...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 단연코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그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는 내 모습이 처량했다.
촉촉하게 젖은 상태로 나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가 씻었던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매일 하는 샤워에 이토록 긴장한 적이 내게 있었던가.. 내 몸을 씻는 내 손에도 쉽사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사무실에서만 보던 그를 밖에서 본 탓이었을까. 굉장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마음껏 그를 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분명 생각했지만, 그 생각들은 어색함과 낯섦으로 감춰져 버렸다.
서로 나란히 어깨를 부딪히고 비스듬히 앉아 앞만 봤다. 민망했으므로. 어색하게 웃던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내가 낸 용기에 그다음 순서는 어색하지 않게 순조롭게 이어졌다. 입술을 포개어 그를 향해 몸을 틀어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샤워가운을 벗겨냈다. 그리곤 그의 보드라운 몸 위에 올라갔다. 입술을 떼지 않고 카디건 단추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체였다.
막 씻고 나온 탓일까. 그의 눈빛은 오늘따라 더욱 촉촉해 보였고, 눈동자에는 내가 보였다. 나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보는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의 눈동자다. 곧고 정교한 콧날과 조그만 입술을 가볍게 벌린 모습을 내려다보는 나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에 젖었다. 나는 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를 이렇게 자세히 눈에 담아 오는 일은 두 번 다시 내게는 없을 테니깐. 모조리 기억하고 싶었으니까.

금기를
용납한다는 건, 사랑이 아닐 수 없잖아요..

공손, 다정, 착함, 배려, 바른생활사나이, 점잖은, 바람직, 정직은 그에게 모조리 어울리는 수식어다. 어디 하나 어색하지 않는 수식어가 분명한데, 그런 그가 자꾸만 나에게만 흐트러진 모습과 얼굴을 보여준다. 처음 내게 실수인지 아닌 지 모를 손길에서 느꼈던 그의 떨림과 조심스러움은 그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예의 바른 모습으로 포장하고 세상을 살고 있지만, 내면에는 바람직한 커튼 뒤에 감춰진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을 오직 그에게만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이와 그 욕망을 나누고 있겠지. 내가 이토록 그를 갈망하고 원하고 있는 중에도 그의 옆자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한결같이 차지하고 있을 여자가 몹시도 밉다.
침실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일상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와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두 번 다시없을 기회였으니깐.
그를 눕혀두고 내 몸이 원하는 대로 그를 잔뜩 탐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내가 받았던 그의 배려와 부드러움을 전하고 싶었다. 하여, 그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입속으로 끌어와 나에게만큼은 그가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무해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허나, 나도 그에게는 여자이고 싶었나 보다. 그의 텅 빈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그에게는 욕정만 가득한 모습만을 기억하게 둘 수는 없었다. 두 번 다시없을 기회를 그에게만큼은 여자이고 싶은 나를 나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슬펐다. 죄다 틀린 것만 잔뜩 끌어안고 있는 내 모습이 몹시도 서글펐다.
그의 입술 사이로 틈을 보이면 그 틈으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고, 끝이 빨간 귀에다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사랑을 속삭여 주었다.
넓은 가슴엔 입속으로 끌어와 동경을 맛보게 해 주었다.
엉터리로 사랑을 그에게 전했으니 그에게 닿지 못한 걸까.. 왜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
사랑은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만으로 볼 수 없기도 하고, 볼 수도 있다. 내가 그러하니깐. 나의 사랑은 육체적인 결합 말고는 그에게 닿을 길이 없으니깐.

"입으로 해줄까요"
"아뇨!!"


본능적인 욕구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에도 나를 감추고 그를 무해하게 사랑을 한 나를,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 그게 그와 나의 간극이니깐.
모순적이고 매혹적인_ 슬픈 사랑은 은밀한 순간에 금기를 맛보았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내게서 가능치 않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는 몽환적인 빛을 잔뜩 머금고 있음에도 그럴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지나고 나서 금방 또 후회했다.
아마, 후회하지 않는 일을 했다 한들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그와 사적인 시간은 짧았고, 그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탐하고 싶은 대로 모두 다 해볼걸... 그에게 다 하고 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를 끝없이 갈망하고 원하는 나를 잠재울 수 있지 않았을까.
단순한 육체적 행위를 넘어, 진솔한 사랑을 그에게 전했으니 그걸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그에게 오늘이 어떻게 기억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 사랑이 넘쳐흘러 흘러 그에게 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너무도 많이요.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른 남자만 찾는 내 눈을 다른 시선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도 야속했다. 마치 자정이 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낭만은 끝났고, 현실은 암담했다.

마음아, 니가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잿빛투성이인 나를 마법의 시간을 준 그는, 그와 함께 한 모든 시간 동안 반짝이는 별처럼 빛났다. 자정이 되면 흔적조차 사라질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없고 덧없는 시간이었다.

한 번만, 나 좀 사랑해 줄래요.
보고 싶어요. 죽을 것만 같아요.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요.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이러면 반칙 아닌가요?
내 모든 사랑을 가져가놓고선 나는 어쩌라고요.
내 사랑 다 드릴게요, 그러니 나 좀 봐줘요.


그칠 줄 모르고 비는 하염없이 내렸고, 그는 떠났다.
멈출 줄 모르는 마음은 그를 향했지만, 그는 멈췄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을 덩그러니 길 한복판에 세워두고 그는 가버렸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를 빗속을 눈물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