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과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 건 어쩐지 과거형이 되어버린 탓에 동화책을 쓰는 것 같아요. 먼지 덮인 책을 후- 하고 불면 마법의 가루가 날려서 아름다운 동화 속으로 돌아가 넘실대는 사랑에 가 닿아요. 내가 쓰는 동화에선 순수하고 어여쁜 공주, 용맹하고 멋진 왕자는 없어요. 대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갗에 새기고 한 지붕 아래 사는 중년 남자와 모든 걸 가졌음에도 텅 비어있는 중년 여자가 주인공일 뿐이죠. 우아한 드레스에 비즈 박힌 유리 구두를 신거나 멋진 턱시도 따윈 없어요. 그 대신 삶에 무게만큼 무거운 유니폼과 매일이 불안함 속에서 갑옷처럼 스스로를 지키는 오피스룩을 등장하죠.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별빛달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 따위도 없어요, 그렇지만 무도회의 주인공은 당신과 나예요. 낮에 뜨는 투명한 달빛 아래, 바다의 물결은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요. 파도는 어림없는 마음이라고 내게 호통을 치고 있어요. 처음부터 당신의 눈을 보았고, 나는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이겠죠.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백을 멈출 수 없었고요, 차가운 바다에 헤엄치며 물기고도 사람도 아닌 인어가 된 운명을 택한 것이겠지요. 화려한 비늘,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움직여 마녀에게 스스로 목소리를 건네주어 당신의 안온함을 묻는 건, 그건 바로 사랑이에요.
#그린라이트
"편집장님, 이만큼이면 회사 들렸다 집에 갈 수 있어요?"
당신에게만 유독 경계가 쉽게 풀려버렸어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처음 있는 일이에요. 당신은 내가 어느 누구에게나 경계를 금방 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뭐 할 수 없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깐요. 그런데요, 나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요. '배려 깊고, 유순한 사람이니 편집장님으로부턴 안전할 거야. 그러니 경계를 풀도록 해'라는 행동명령을 나는 나에게 내린 적이 없었어요. 단 한 번도요. 그럼에도 나의 방어기제는 일제히 당신에게 자신의 배를 보여주며 만져달라는 강아지처럼 무력함을 드러냈죠. 돌이켜보자면요,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도 당신에게만큼은 이해해 줄 것 같았어요. 왜 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많이 나오잖아요, 한가로이 물 마시는 초식 동물의 연약한 목덜미를 향해 달려오는 육식 동물은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도 공격을 한다고요, 그게 사냥의 본능이래요. 당신은 그 본능마저 순할 거 같았어요. 그럴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죠. 지금은 온통, 죄다 당신에게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나를 보게 돼요. 웃겨요. 당신에 대해 진짜 아는 거라곤 없는데, 어쩜 이리도 경계를 풀 수 있었을까요.
곱씹어보면요, 첫 남자에게만 묻는 내용을 당신에게도 묻고 있는 내가 생각날 때가 있어요. 몰랐었어요. 당신이 생각보다 깊이 들어와 있어 놀랄 뿐이에요. 그래서 조금은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첫 남자에게 가는 물음이 당신에게도 향하는 까닭은 분명히 알지만요, 구분 지어야겠지요.
당신에게 더 많이 기울어진 마음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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