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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184 쌓아두면 독이되는


#쌓아두면 독이 되고 마는 그리움

사랑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는 가진 것을 사랑하라.
-루시라부틴

무슨 수를 써도 나는 그를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럴 때는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이 가지기 전에는 분명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간절함으로 이룬 나의 갖고 싶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고 말았다. 그도 내가 갖고 나면 또다시 갖지 못한 것들에 눈을 돌리겠지? 그는 다르겠지만, 그를 갖고 나면 그럴 거라고 단정 지어버리자. 그래야 그에 대한 소유욕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저 갖고 싶은 그의 마음을 갖지 못한 집착에서 온 거라고 믿을 테니까.

#금요일 오후

"트레이너님, 저 오늘 아파서 운동 무리하면 안 돼요"

나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꾀병인지 아닌지 동태를 살핀다. 뭐 누구는 맨날 아프고 싶어서 아픈 줄 아나...?

"회원님은 운동하는 날만 아픈가 봅니다"
"아니에요!! 오늘 김장 준비하고 무거운 거 들고 다니고 칼질 많이 해서 갈비뼈에 담 왔어요ㅠ 너무 아파서 정형외과 가서 약도 처방받아왔어요. 보세요!!!!!"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트레이너에게 내 말에 꾀병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약봉지를 들이밀며 발악하는 모습이 참말로.... 못나보였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아니요. 아직 아파요. 물리치료하고, 주사 맞고, 근육이완제 먹었더니 지금은 말할 때 조금 덜 아프긴 한데, 오전에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팠어요ㅠ 지금도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뻐근하고 불편하고 아파요"
"매트에 누워보실래요?"

굳이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왜 왔을까? 그냥 하루 쉬면 될 것을?? 그건 아마 오늘 가지 않으면 다른 날에 오늘 할 운동을 보충해야 함이 분명하기에 그냥 간 것이다...

"어디가 아픈지 짚어보세요"
"정확하게는 여기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왼쪽 여기가 아파요"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코어 근육을 제대로 사용 못하시니깐 무거운 거 든다고 무리하게 몸을 사용해서 갈비뼈 담이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중간 생략)저랴ㅕㅑㅋ츄어냐랴ㅑㄹ왜왜왜ㅚㅓㅗ너ㅔ츄초퍼"

하..  누워서 한참을 트레이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 주먹이 그의 입을 정확하게 한대 먹이는 상상을 해보았다..

"자, 엎드려보세요"

매트에 엎드리는 데 굉장히 아팠다.

"너무 아파서 못하겠어요ㅠㅠㅠㅠ"
"네? 안 들려요"
"아파ㅠㅠ"
"네??"
"아프다고요ㅜㅜㅜ"
"그럼 누우세요"
"못 일어나겠어요ㅠㅠ살려주세요ㅠㅠ"

결국, 트레이너가 엎드려 파닥 거리는 나를 뒤집어주었다.

"말할 때도 아파요?"
"앉아서 말할 때는 덜 아픈데 엎드려서 말하니깐 너무 아파요ㅠ"
"어떻게 아파요?"
"꾸욱ㅡ 아파요ㅠ"
"일단, 추우면 더 근육이 긴장하니깐 찜질팩으로 근육이완하고 풀어봅시다. 가만히 계세요"
"네"

찜질팩 두 개를 가져와 하나는 등에, 하나는 갈비뼈에 올려두고 누웠다.

"여기 아파요?"를 연신 물으며 여기저기를 눌러본다.
"회원님은 복사근을 잘 활용해야 허리 통증도 줄고, 담이 안 걸려요. 오늘은 스트레칭만 합시다. 따라 하세요"
"네"

매트에 앉아 트레이너가 알려주고 보여주는 스트레칭을 따라 했다. 힘든 동작을 시키지 않아 마음도 편했고, 긴장이 풀어져 가벼워진 듯했다. 그마저도 잘 못하고 자극을 줘야 하는 부위가 아닌 곳을 움직여 혼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리하게 시키지 않았다.

"다시 매트에 누우세요. 숨을 쉴 때마다 겨드랑이부터 갈비뼈까지 불편하고 아픈 거 보면 전거근? 이 긴장해서 담이 걸렸을 거예요. 갈비뼈에 붙어있는 전거근을 찾아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쓸어주면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많이 아파요????"
"아니 아니 아픈 게 아니라 흉곽을 지지하는 전그근?을 찾아서 눌러야 된다고요"
"아... 알려주시면 제가 집에서 할게요"
"그럼 제 갈비뼈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알려드릴게요"
"트레이너님은 뼈가 없는데요? 안 느껴져요"
"근육이 많아서 그래요"
"아... 네"
"하는 방법 알려드릴 테니깐 집에서 누워서 해보세요"
"네"
"누우세요"
"팔 앞으로 나란히. 괜찮으세요?"
"네"
"만세 할 수 있을 만큼 뒤로 젖히세요. 좋습니다. 여기 여기 이 사이를 꾹 눌러서 쓸어주는데 조금 힘을 실어서 자극이 가게 하세요. 오른손으로 한번 눌러보실래요?"
"이렇게요?"
"살살 말고 조금 무게감을 실어서"
"네 이렇게요?"
"네 조금 더 자극이 될 수 있게"
"네..."
"전거근 마사지는 집에서 하시고, 경갑하건??? 마사지나 소흉근 마사지 해드릴까요?"
"그냥 집에 갈게요. 쉬고 싶어요"
"네 그래요, 그럼. 아! 발가락은 좀 어때요?"
"아파요. 발톱은 빠지지 않았지만 검은 매니큐어 칠한 것처럼 멍들었어요"

트레이너가 미지근한 물을 한잔 마시고 가라 권했지만, 거절했다. 또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잔소리를 할까 봐 얼른 내려왔다. 언젠가는 내가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어야겠다....
카카오택시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살짝 연 창문틈 사이로 늦은 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그는 무슨 동에 사는 거지?'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같은 지역에 사는 건 직장이 이곳이라 알고 있지만, 어느 동네 사는 걸까. 우리 동네에 사려나? 택시에 몸을 싣고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많은 동을 지나쳤지만 그가 사는 곳을 몰라 결국 내 그리움이 정착지를 잃었다.
집에 도착 후 곧장 욕실로 향했다. 빠르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내고 거울 속 내 모습을 봤다. 옅어지고 있는 흔적들에 만족했다. 곧 그를 보러 갈 것이다.
빨리빨리빨리 보고 싶다.


#망했다

엄마집 김장준비하는 날, 노동의 대가로 작은 머그컵에 맥주 한잔으로 이미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엄마와 달리 술 잘 마시는 이모들은 분명 맥주가 부족했다. 낮술 한잔에 이미 행복한 내가 심부름을 자처했다. 분명 낮이었다.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조금 오른 취기에 마트로 향했다. 붉어진 뺨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딪히는 시원함이 기분 좋았다. 발걸음도 흥이 잔뜩 올라있었다. 신나고 들뜬 발걸음과 웃음을 잔뜩 머금고 마트로 들어갔다.
하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다했던가. 가짜 그는 낮에 한 번도 본적 없었는데, 있었다. 안경 쓰고 보니 진짜 정말 닮았다. 아니, 똑같다. 전에도 말했지만 차이점은 늙음과 젊음뿐이었다. 다른 직원과 이야기하다 웃은 건지 취기가 한껏 올라 들뜬 발걸음을 보고 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란히 서 있는 두 명의 직원이 날 본다. 급하게 정색하고 취기가 올라 한껏 행복하고 들뜬 마음을 꾹꾹 자제시켰다. 맥주를 계산하려 셀프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었다. 미성년자에게 술은 판매금지이기에 직원을 호출하는 삐빅 소리가 들렸다. 나도 주위를 둘러 직원이 있나 찾았고 나는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ㅠ
그가 내게 온다. 근처에 계셨던 직원이 가지고 있던 카드로 소리를 멈추게 하셨다. 급하게 계산하고 영수증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맥주 세병을 들고 마트를 나왔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긴장하거나 불편하면 실수투성인 불안장애가 있다. 결국 내가 들고 갔던 에코백을 두고 왔고, 그가 들고 날 따라왔지만, 그냥 쌩까고 집으로 달려가버렸다....
뭔가 뿌듯하고 행복했다...  키 큰 가짜 그를 따돌려서 기뻤던 건지.. 술에 취해 행복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 당분간 그 마트는 못 간다. 절대 못 가지. 엄마 에코백은 내가 새로 사드려야겠다. 그리고 언넝 어른 남자에게 가서 물어봐야겠다ㅠㅠ 동생이 있냐고 말이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 가짜가 진짜 동생이냐고.....
이제 가짜 그는 필요 없다. 내 몸에 흔적들이 옅어지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이제 곧 진짜 그를 보러 갈 것이다. 히히^^ 딱 기다려라. 내가 간다^^
오늘부턴 술 안 마시고 미친 듯이 달려야지!
그는 내게 활력소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