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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159 바나나 사랑



  새벽에 도둑 비가 내렸다.  떨어진 낙엽눈 위로 빗방울이  맺혀 맑은 영롱함이 송골송골 매달려 있다. 이른 아침 가을비로 촉촉해진 강변을 내달렸다. 다리 사이에서 얼얼한 느낌과 골반인지 허리인지 애매모한 뻐근함이 느껴졌고, 동시에 나는 그를 떠올리며 달렸다. 달리다 이내 멈춰서 급하게 까먹었던 스트레칭도 했다. 핫둘핫둘. 그리고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캔디맨-일기'노래가 귓속에 울려 퍼졌고 상쾌한 아침이지만 몸은 가볍지 않았다. 정신이 지배하는 신체, 달릴수록 어른 남자가 선명하게 떠올려졌고, 달리는 속도만큼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삽시간에 부풀어졌다. 함께 달리지 않지만, 마음만은 함께 달리는 듯하여 기분 좋았다. 뛸때마다 나에게 머물던 그의 흔적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몸의 통증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달리기가 나의 도파민인지, 그가 도파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0킬로를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곧장 화장실로 향했고, 땀에 젖은 레깅스와 땀복을 힘들게 벗어내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나는 젊은 듯 젊지 않았으며, 늙은 듯 늙지 않아 보였다.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 듯했다. 내 눈엔 말이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딱 중간 미지근한 그의 체온만큼 물의 온도를 맞추고 샤워기 안으로 들어갔다. 미지근한 물은 마치 그가 날 감싸 안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내 몸도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볼에 거칠게 펌핑하여 바디워시를  몸에 문지르며 잡생각을 떨치려 과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손에 닿는 미끌거림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 미끌거림은 후유증으로 욱신거리고 우리우리하게 아팠다. 분명, 진짜 분명, 그를 만나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었다. 그가 날 변하게 한 건지, 그냥 이 나이에 생기는 타이밍인 건지 알 수 없으나 내겐 그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아침 식사 전, 천연비타민인 과일을 먹는다.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오늘 먹을 과일들 중에 며칠 전 사놓은 바나나가 후숙이 잘 되어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그를 또다시 떠올려버렸다. 조금 늙으신 그의 어린 시절에 바나나가 귀했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 진짜. 이런 게 세대차이겠지? ㅋㅋ 옛날사람. 바나나를 먹어보고 싶다던 어린 그는 처음에 먹는 방법도 몰랐다고 했다.

"껍질을 까서 먹는 데 너무 맛있더라고요. 달큼하고"

조곤조곤 그의 바나나 첫 시식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내 입에 바나나 향이 나는 듯했고 내 귀는 간질간질거렸다. 그의 마스크 속 입술에 입을 맞추며 바나나 향이 날 거 같았다. 바나나 이야기가 이렇게 심쿵할 일인가.. 이렇게나 달콤한 이야기야?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으면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바나나를 한 트럭 사서 집 앞에 몰래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웃고 말았다. 그가 어린 시절이 몇 살인지 몰라 내가 태어나기 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바나나를 먹으면서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먹었다. 바나나가 이렇게 사랑이 많은 과일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오늘 아침 가장 맛있고 달큼한 바나나를 먹을 수 있었다.
  그의 사적인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하다. 별 시답지 않은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라는 점이 어느 베스트셀러 소설책보다 내게는 더 흥미 있는 이야기이고, 또 바나나보다 달콤한 그의 음성에 기분 좋은 말투, 거기다 조곤조곤 쉼이 있는 말소리까지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
입이 짧고 비위가 약한 그와 그의 어머니? 반면에 나는 뭐든 잘 먹는 먹보. 아마 나를 식충이쯤 생각할 거 같다ㅜ  더 이상 많이 먹는다는 이야기는 안 해야겠다. 적게 먹는 사람들은 많이 먹는 날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덜컥 겁이 난다. 그도 날 그저 먹깨비처럼 볼까 봐 ㅠㅠ
그를 생각하며 바나나 8개 중 7개를 먹어버렸다^^
그에게 쪼르르 가서 더 더 더 이야기해달라고 조르고 싶다. 그러면 말주변도 없다고 무슨 이야기 할까요 라며 되레 내게 묻겠지 . . .? 분명하다.
오늘도 나의 그는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내가 응원하고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