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씨"라고 불리는 순간, 나는 잠깐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
“선생님!!!!” 하고 소리 내어 부르면서도, 사실은 그 호칭 안에 안도와 의지를 함께 넣어 건넸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건 내가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이 사람은, 자주 보지 않아야 더 좋은 사이가 되는 사람이다.
괜찮을 때는 서로의 삶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도 되는 관계.
“강박도 다시 생겼네요?”
담담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쓰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그만…”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졌다는 소리죠.”
“무서워요….”
“괜찮아요. 자기 방어 센서예요. 잘하고 있는 겁니다^^”
다그치지 않는 말투.
조곤조곤,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
나의 구겨진 마음을 죄다 펼쳐 보여도 흩어지지 않을 사람.
내 상담자이자, 선생님.
‘잘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에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울면 안 될 이유는 없었지만,
괜히 버티고 싶었다.
“모두 지난 일이고, 괜찮았는데…
왜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들이 생길까 봐 걱정이에요.”
말을 꺼내는 동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재발’이 아니라,
다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최근에 그 생각이 떠오를 만한 사건이 있었을 거예요.
그걸 얘기해 봅시다.”
그 말에,
나는 마음속에 남아있던 장면 하나를 천천히 꺼냈다.
그저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미 지난 나를 건드려 버린 기억.

연말의 기록
얼마 전, 회사 송년회가 있었다.
평소 회식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못하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망년회 겸 송년회만큼은 빠질 수 없어
늘 그렇듯 2차부터 합류했다.
콜라를 연거푸 마시고,
소주잔에 담긴 하이볼도 몇 잔 넘겼다.
이미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과장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ㅠㅠ”
“오늘 너무 수수하게 오신 거 아닙니까…”
쏟아지는 말들에 웃으며 대답하다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가방에서
아끼던 조개껍질 손거울을 꺼냈다.
LED 조명 아래의 내 얼굴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다크서클과 퀭한 눈을 가리려 애썼지만
여전히 만만해 보이는 얼굴.
낮은 콧대, 동그란 콧망울,
연한 립 컬러, 단발머리까지.
하얀 골지 티에 청바지,
베이지 목도리를 두른 내 모습이
그날따라 유난히 싫었다.
나는 거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수수함’이
괜히 부끄러웠다.
“박 과장, 지금도 충분히 예뻐.
고만 들여다봐라 ㅎㅎ”
"알아요^^"
사무장의 농담에 농담으로 답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건 능숙하다.
사회생활의 경력자이니까.
일도 잘한다.
고객 만족 우수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단상에 오른다.
나긋한 말투, 상냥한 웃음 덕분에
나는 늘 ‘참하고 똑똑한 직원’으로 불린다.
그 대가로 받은 금 3돈과 봉투.
이직하지 말라는,
오너의 다정한 협박 같은 선물.
사람들은 내 얘기를 했다.
사납다, 냉정하다,
앙칼지다, 개구쟁이다, 웃기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어떤 게 진짜 제 모습이에요?”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오너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아,
빈 잔에 맥주를 따랐고 나는 술잔을 기울였다.
직책이 아닌 이름을 불릴 때,
그가 꽤 취해 있다는 걸 알았다.
"선혜양 내년에도 잘 좀 부탁해^^"
"네..^^;;"
"절대 절대 다른 데로 가면 안 돼ㅜ
가면 따라가서 데려올 거야"
장난과 약간의 애교가 섞인 말투였지만,
그 말은 무서웠다.
"여기에 뼈를 묻을까예??^^"
"그래준다면 나야 두 팔 벌려 대환영이지"
"항상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예뻤어. 안 예뻤던 적이 없었어"
"^^;;;; 취하셨어요"
다행히 친한 언니가 분위기를 바꿔주었고,
막내는 술김에 울분을 터뜨렸다.
신혼 1년도 안 된 아이는
남편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파장할 시간이었다.
나는 많이 취한 막내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연말의 거리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가로등이 드문 길로 가려는 막내를 붙잡았다.
“여긴 너무 어두워. 다른 길로 가자.”
"여기로 가야 빨라요"
술이 조금 깬 막내는
남편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건 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서러움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때였다.
멀리서 휘황한 조명 사이로,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다가왔다.
술에 취한 남자 셋.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내 옆엔 아직 어린 막내가 있었다.
“몇 살이야?”
누군가 던진 말에
막내가 대답했다.
“물만큼 먹었다 왜.”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쳤다.
막내를 두고 달리면,
나는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자들은 우리를 불렀고,
막내는 지지 않았다.
말은 거칠어졌고,
공기는 빠르게 날이 섰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과장이라고?”
휴대폰 불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몸이 얼어붙었다.
너무 익숙한 상황이었다.
어둡고,
사람 없고,
우리는 둘,
그들은 셋.
이번엔 벗어날 수 있을까.
다행히 말리던 한 사람이
일행을 데리고 물러갔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그렇게 안도감으로 들릴 줄 몰랐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려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막내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없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막내처럼 하지 못하는 나를
나는 오래 자책했다.
왜 나는 늘 약자의 자리에 서 있을까.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왜 순순히 엮여버렸을까.
그 순간,
잊고 있던 20대의 기억이
숨 막히게 되살아났다.
나를 향해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들이
사실은
내 약함을 알아본 결과였던 건 아닐까.
그날 밤,
나는 막내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나를 무섭게 미워했다.
나약했던 나를.
그리고 아직도 완전히 강해지지 못한 나를.
몸은 이미 집에 도착했는데 마음은 한참을 낡고 더러운 그 골목에 남아 있었다. 집에 들어와 패딩을 벗지 못하고 서 있었다.
심장이 늦게서야 제 박자를 찾는 느낌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이 나를 더 오래 붙잡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따뜻한 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송년회 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그날 밤의 나는,
예쁘지도 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살아남기만 한 사람 같았다.
막내는 용감했고,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 차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나는 늘 상황을 무마하려 했을까.
왜 웃으며 넘기고, 화를 삼키고,
‘아무 일도 아니게’ 만들려고 애썼을까.
그 선택들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줬다고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를 가장 뒤로 밀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기억들로 미끄러졌다.
도망치지 못했던 순간들,
싫다고 말하지 못했던 장면들,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던 수많은 밤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참으면 지나간다.
크게 만들지 말자.
괜히 내가 예민한 거 아닐까.
하지만 그날 밤 골목에서 느낀 공포는
분명 과거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머리는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그 느낌.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다시 강박이 고개를 들고,
사소한 소리에도 놀라고,
사람들의 시선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든 이유가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나는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도망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래 혼자서 버텨왔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괜찮았다고 믿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다시 말을 걸어왔다.
잊은 줄 알았던 장면들이
밤이 되면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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