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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11 접선


수학 시간,
곡선과 직선이 만나는 순간을 배운다.
선생님은 그것을 접선이라고 한다.
나는 직선, 그는 곡선.
서로 다르지만, 닿을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닿는다 해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으며 이내 멀어지고 만다.
그 짧은 접선의 순간이 전부이다.
우리는 접선을 지나고 있다.
그와 나는 접선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래야만 한다.




첫째가 학원차량에서 내리고 나면 10분 정도 뒤에 둘째 유치원차량이 도착한다. 이날은 유난히 첫째가 피아노 학원을 혼자 가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둘째 하원 후 같이 걸어가면 학원 수업시간이 늦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아기 아빠가 하원하는 아이를 받으러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아.. 첫째가 혼자 가기 싫다고 해서요"
"천천히 오세요. 제가 차 오면 데리고 있을게요"
"네 감사해요. 빨리 다녀올게요!"

첫째를 학원까지 데려다주고 선생님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나는 곧장 둘째 아이가 하원하는 장소로 달렸다. 아기 아빠가 보이지 않았고, 유치원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하고 소리를 냈다. 잠시 뒤 그의 품에 안긴 둘째가 편의점에서 나왔다.

"엄마~~~~ 아저씨가 젤리 사줘떠!!!"
"그랬어? 엄마한테 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둘째를 품에 안아 꼬옥 끌어안았다. 아이에서 그에게 나는 향수인지 섬유유연제 인지 모를 향이 났다. 낯설었다.

"매번 안 사주셔도 되는데...  죄송하고 감사해요"
"아니에요^^ 한꺼번에 먹지 말고 나눠먹어야 해^^"
"웅!"
"아저씨한테 '네~' 해야지"
"네!"

검은 봉지를 손목에 건 둘째는 한껏 신이 나있었다. 그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둘째 유치원 가방을 내게 건네주었다. 둘째를 안고 있던 터라 가방이 흘러내려 불편했고, 그는 내가 가방을 멜 수 있게 다시 도와주었다.

"유치원 가방도 딱 맞네요??^^"

그는 얼굴은 한껏 미소를 만들고, 내게 말했다.
'가방도??' 보조사 '도'는 역시, 또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가 '유치원 가방이 딱 맞네요'가 아닌 '유치원 가방도 딱 맞네요'라고 말했다. 아마 첫째 가방을 메고 갔던 때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웃음이 잔뜩 묻어있었고,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맨날 그렇게 웃겨요...."
"어른이 유치원 가방이 딱 맞는 게 너무 웃겨서요 ㅎㅎㅎㅎ"



"저 먼저 가볼게요"
"아 네. 내일 아침에 봬요^^"

내 품에 안겨 있던 둘째는 연신 내 등뒤에 있는 그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자, 손 먼저 씻고 젤리 먹는 거야^^"
"웅!"

유치원에서 배운 손 씻는 방법 그대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외출복을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검은 봉다리를 찾아 내게 들고 왔다.

"엄마 이거 봐! 엄청 많지??"
"에??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건 엄마 초콜릿, 새콤달콤은 엉아꺼, 마이쭈는 내꺼, 하리보는 엉아랑 내랑 같이 먹을 거. 사탕은 그냥 아저씨가 사준 거야"
"엄마 것도 샀어?^^"
"응 아저씨가 엄마 좋아하는 거 골라라 해서 내가 이거 샀어. 약과가 엄떠"

갑자기 퉁명스럽게 말하고 올라온 게 미안해졌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아!! 엉아, 밥 다 먹고 새콤달콤 줄게. 하리보는 같이 나눠먹고!"
"그래 밥 빨리 먹고 같이 나눠먹자"
"아빠 꺼는 없어?"
"응! 아빠는 먹을 수 없어. 아저씨가 아빠 꺼는 안 사주었거든!"
"어떤 아저씨?"
"착한 아저씨"
"그... 아들 둘 아빠 있잖아. 사람 좋게 생긴 부부"
"아아. 아빠도 같이 나눠먹자~~"
"그러면 밥 깨끗이 다 먹는 거 보고 생각해 볼게"
"그래^^"

우리 집 세 남자는 큰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를 외치고, 각자 먹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젤리 먹을 시간이므로...
검은 봉지를 손목에 끼우고 의기양양 들고 나오는 둘째는, 그 모습이 마치 총을 들고 전쟁터로 향하는, 비장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웃겼고, 귀여웠다.

"이거는 엉아, 이거는 내꺼, 이거는 엉아랑 나랑 둘이! 이거는 엄마, 아빠는... 그냥 사탕 먹어!"
"에게~ 아빠는 사탕 안 좋아해. 엄마 초콜릿 나눠먹을게"
"안돼!!! 아저씨가 엄마 먹으라고 사준 거야!!!!"

남편이 초콜릿을 안 먹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근데 갑자기 왜 사줬데?"
"**가 피아노 혼자 가기 싫다고해서, 데려다주고 오는 사이에 편의점 데려갔나 봐"

"내일은 같이 가"

갑자기 남편이 내일 아침 등굣길을 함께 하자고 했다. 근무가 아니었으므로.

#뒷날 아침

남편이 등원과 등교를 함께 하는 날은 평소보다 더 수월해야 되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더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빠랑 가기 싫다는 찡찡대는 둘째가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고, 남편은 삐치고 말았다. 젠장. 밴댕이소갈딱지가 따로 없다.
첫째는 아빠 손을 잡고, 둘째는 내 품에 안겨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차가 지나간 건 아니겠지...?'

"엉아랑 아빠한테 빠빠이 해. 엘리베이터 도착하면 뛰어야 하거든"
"빠빠이 ㅠㅠ"

울면서 인사했고,  다녀오라는 답인사를 들었다.

"1층입니다"

둘째를 품에 꼭 안고 뛰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유치원 차량이 신호에 걸린 걸 봄과 동시에 아이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 아빠는 유치원 차량을 세우기 위해 신호 걸린 차로 향했고, 아기 아빠 덕에 둘째를 간신히 태울 수 있게 되었다.

"휴, 감사합니다. 덕분에 태웠어요 ㅠㅠ 너무 감사해요"
"아뇨,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첫째는요?"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고 뒤에 오는 남편과 첫째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남편과 아기 아빠는 서로 인사했다.

"오늘은 아빠랑 가, 엄마는 바로 출근할게"
"싫어. 오랜만에 아빠 엄마랑 다 같이 학교 갈래"
"그래, 갔다가 가"

남편이 한마디 거들어 5명이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인원수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어색해서 인지 모르겠지만, 나란히 걷지 않았다. 우리 셋은  한 걸음 앞에 걸었고, 그와 그의 아들은 한 발자국 뒤에 걸었다.
아이와 간간히 이야기하는 거 말고는 오고 가는 대화가 없었다. 대화가 줄자 등굣길에 오고 가며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덩달아 남편과 아이는 나를 따라 줄곧 인사했다.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신호를 봐주시던 경비원 아저씨께도 가벼운 목례를 하고, 신호가 없는 건널목을 건널 때는 기다려주는 차를 향해 가벼운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인사를 열심히 하며 교문 앞에 도착했고, 진한 포옹으로 나와 남편을 안아주고 친구와 교문을 들어섰다.
누구가 먼저 랄것도 없이 우리 셋은 거리를 두었지만, 나란히 걸었다.

"경비아저씨 제외하고 남자만 9명 여자는 2명"
"응???"
"너가 아침에 인사한 사람들 말이야. 남자는 9명, 여자는 2명이라고"
"그게 왜.....??"
"얘들 엄마들보다 아빠들이랑 인사를 많이 하길래"
"아.. 얘들 엄마들이 나 안 좋아해"
"왜?????"
"몰라??"
"저 그 이유 대충 알아요"
"????"
"네?"
"흔하지 않은 캐릭터래요. 아들 둘이랑 해맑게 뛰어놀고 같이 놀아주는 유니콘 같은 엄마??"
"아ㅋㅋㅋ네, 애엄마가 얘들이랑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놀아요.  그런데 왜 싫어한데요?"
"얘들한테 엄청 잘 웃고, 리액션도 잘해주는데 다른 엄마들이 말 걸면 바로 정색한다던데... 쌀쌀맞데요"
"그건....."

내 말을 끊고 남편이 말을 이었다.

"와이프가 낯선 사람 경계가 좀 심해요, 낯가림도 심하고요. 쌀쌀맞진 않은데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려요"
"네 그런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그가 왜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아...... 와이프가... 전에 얘기해 줬어요^^;;;;"
"ㅋㅋㅋㅋ그쪽 집사람도 그중 한 명이었나 보네욬ㅋㅋ"
"아니, 아니에요. 지금은 부러워해요. 나이도 많은데 워킹맘에 육아도, 살림도 하고 출산시기도 같은 데 살도 빼고 워너비라던데"
"지. 금. 은 지금 그렇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 나이 많지는 않거든요???"
"ㅠㅠ저 식은 땀나요 ㅠㅠ"

당황하는 그가 귀여웠고 웃겼다. 계속 놀려주고 싶었다.  

"아! 와이프가 다이어트 성공 비결 물어보던데 혹시 비법 있어요?"
"죽을 만큼 뛰면 빠져요"
"그럼 빠져요?"
"네. 살이 빠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어요. 근육도 함께 빠지고요. 무릎, 허벅지 안쪽이랑 뒤 그리고 사타구니가 아파요"
"그런데도 달리시잖아요"
"중독이에요. 내가 봤을 땐 달리기 중독이에요. 집사람은...."

편의점을 지나갈 때쯤, 남편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커피 2개와 두유 하나를 들고 나왔다.

"커피 하나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넌 두유 먹어. 지금 마시지 말고 사무실 가서 먹어야 화장..."
"알았어!!"

남편의 말을 잘라야 했다.

"나 버스 놓치겠어. 뛰어갈게.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워줄게"
"싫어. 나중에 봐"

굽이 낮은 단화를 신었음에도,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달려갔다. 뒤에선 '진짜 잘 달린다'는 말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잠시 뒤 버스가 도착했다.

노래가 이어폰을 타고 귓가에 차례로 넘어가다가 한 노래가 귀에 꽂혔다. 최백호의 '너를 사랑해'였다.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어깨에 젖어드는 빗속에 서면 언제라도 떠오르는 보고 싶은 얼굴

원래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이날 따라 유독 가사가 귀에 꽂혔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분명 사랑이므로, 지금 나는 무조건 직선 이어야 하고, 반드시 그는 곡선이어야만 한다. 접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