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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80 호구가 될래요



"엄마, 봉이 뭐야?"
"봉? 어디서 들었는데?"
"학교에서 친구가 **는 내 봉이라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딸도 봉 있어? 엄마 봉은, 느그 아빠. 엄마 꼬붕은 아빠야^^"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린 나는 봉을 그렇게 이해했다. 아빠는 엄마의 봉이다.
언제나 듬직하고 강한 아빠가 쩔쩔매는 한 사람. 바로, 엄마였다. 작은 콧방울이 빨개지고, 큰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맺힌 엄마를 보면 아빠는 만사 제쳐두고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아빠의 모습이 마치 불도저를 연상케 했다. 아빠는 유일하게 엄마에게만 봉이 었다. 엄마가 웃으면 아빠도 따라 웃고, 엄마가 슬프면 아주 건장한 아빠가 자그마한 엄마를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아빠의 퇴근길에는 항상 우리 간식과 꽃이 있었다. 봄에는 지천에 핀 유채꽃과 풀빵을. 여름에는 알록달록한 들꽃과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카스텔라를. 겨울에는 꽃집에서 파는 다발꽃과 붕어빵을.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언제나 싱그러운 꽃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나는 그런 아빠가 좋았다. 봉은 좋은 사람, 낭만과 로망을 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어린 나는 봉을 그렇게 이해했다. 언제나 아빠는 엄마와 자식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빠를 보고 누군가는 애처가, 팔불출, 딸바보라며 남자 망신을 다 시킨다는 소리를 했다. 대놓고 하지 못하고 늘 아빠와 엄마가 없는 자리에서 쉬쉬하며 이야기했다. 그때는 어려서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들의 부러워하는 소리라는 것을. 그 볼멘스런 소리에 어린 나는 한 사람에게 로망과 낭만을 주는 일이 좋은 게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다. 학교에서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어른들은 내게 책과 세상이 다르다고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좋은 사람이 봉이 될 수도 있다는 세상을 알게 되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봉, 꼬붕이라는 말보다 유의어로 호구라는 말을 자주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호구, 지금은 누군가의 호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가 되었다.

당신의 호구가 되어줄게요.
나는 그렇게 당신의 호구를 자처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찬란했던 삶을 비극적 삶으로 바뀐 건, 사랑이었다.

붙잡아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연이라고 믿어 평생 당신만을 품고 살겠다며 맹세했지만, 그 끝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품고 산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사무치는 그리움의 시간이 연속이므로...
손은 놓아도 마음만은 끝내 놓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궁금합니다. 과연, 당신도 나처럼 진심이었을까요. 끝내 확인할 수 없으니 나만 더 아픕니다.


마지막 방송을 했어요. 이제 당신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읽어주지 않으려고요. 새드엔딩 작가가 하는 사랑은 슬픈 사랑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그만두려 합니다. 나는요, 매 순간 슬픈 사랑을 하고, 온통 슬픈 글을 쓰고, 죄다 슬퍼하는 내가 지겨워졌어요. 모조리 슬픔뿐이에요.

마지막 방송 중에 여주인공이 왜 그 남주를 사랑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내가 왜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지를요.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당신을 떠올려봤어요. 그저, 내 옆에 있던 당신과의 지난 모든 시간들이 이유 없이 당신에게로 마음이 흘렀어요. 사랑은 늘 선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피어나더라고요. 당신의 이름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내 마음은 당신의 곁에 머물러 있고, 당신의 모습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당신의 다정함과 온기가 내게 와 머물러 있어요. 당신은 그 어떠한 것을 내게 요구하지 않았던 대신, 나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당신은 조용히 내게 곁을 내주었죠. 고요히 마음이 머무는 곳에 늘 당신이 있었어요. 당신이니까.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이유였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저 당신이니까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이유에 장황한 설명 따윈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 향하는 진심 하나를 꺼내면 그게 온통 사랑이더라고요.
방송 중에 독자가 또 물었어요. 이 정도면 남자주인공은 코 안 대고 코 풀었다고 정녕 바람둥이 맞는 거 아닌가요 라고요.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지난날들을요. 바람둥이는 아닌 거 같아요. 당신이 그냥 내 감정 자체를 낱낱이 잘 알아차렸어요. 하여, 쉽사리 나를 달래주었어요. 내가 어떤 행동과 말을 좋아하는지 알았고, 그걸 잊지 않고서 내가 좋아할 만한 말들을 해주었어요. 그런 배려가 너무 좋았어요. 뭐가 더 있었을까요. 아!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도 친절하게 대꾸해 주는 그 다정함도 좋았어요. 당신도 알 거예요.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듣고 싶어 말을 걸었던 나를요. 걱정을 하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매번 다독여주었죠. 짜증 한번 내지 않고요. 또 직업병으로 생긴 고질병을 당신은 잘 알아차렸줬어요. 어깨 통증과 목 통증이 불편한 날 위해 주물러주던 따뜻한 손길과 걷는 걸 좋아하는 내가 걷기에 좋은 날씨인지 늘 걱정해 주었어요. 세심하고도 다정한 그 배려가 너무 좋아, 혼자만 알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심통이 나서 바람둥이라고 놀려댔던 거 같아요.
마지막 방송이 막상 당신과의 사랑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당신에게 받았던 배려를 회상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주책맞아 보였을 거예요, 분명. 당신 때문에 마지막 라방을 망쳤어요. 해서, 당신에게 달려가서 '편집장님 때문에 전부 망쳤잖아요! 온통 다 망쳐버렸어요!' 하고 떠져 묻고 싶어요. 그러고 울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면 착한 당신은 나를 달래주겠죠. 그렇게라도 당신의 다정함을 받고 싶어요. 내게서 당신을 끊어내겠다 매일을 다짐하지만, 계속해서 당신에게 가야 할 이유와 핑계를 만들고 있는 내가 너무 안되었어요.
당신, 혹시 김학래의 '슬픔의 심로' 노래 아시려나요. 방송 안 보셨겠지만, 당연히 못 보셨겠지만요. 라방이 단순히 내가 쓴 글만 읽어주고 끝내는 방송이 아니에요. 홍보차 하는 목적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 노래도 하고, 상담(웃기죠?ㅎ 저 연애한번도 안 해봤는데 연애상담도 했어요)도 해줬어요. 마지막이라는 방송이라는 이유로 엔딩 노래 불러달라 요청받았어요. 그때 떠오르는 노래가 김학래의 슬픔의 심로였고요. '창밖에는 비가 내려요. 두 사람은 우산도 안 썼네요. 헤어지기 마음이 아파 비를 맞아요 고개를 숙여요 우린 둘만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 가사가 너무 슬펐어요. 부르던 중에 코 끝이 시큰하고 울컥해서 눈 안에는 눈물이 가득 차버렸어요. 결국 2절은 부르지 못하고 울어버렸어요. 다들 우는 이유를 물었지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단지,

"마지막 방송이니까요. 그래서 온통 슬퍼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제 글 응원해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모두 평온하고 안온하시길 간절히 바랄게요. 매일 다정하세요"

그렇게 마지막 방송은 끝이 나버렸어요. 방송은 끝났지만 당신에 대한 마음은 아직은 끝이 날 수 없기에_미련 같아 보여도 내 사랑은 글로만 표현되므로_ 그럴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이 소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나를 이해하지 마세요.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