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가 자욱하게 낀 모습이 안개꽃과도 같다. 그 속을 달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안개꽃 속을 내달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술기운 탓인가?
과음하고 말았다. 두 모금이 나의 주량인데... 세 모금을 마시는 바람에 얼마 자지도 못하고 술의 기운을 공중에 날려 보내려 나왔다. 오늘은 날이 따뜻할 모양이다. 짙은 안개가 낀 걸 보고 오늘 날씨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서른 중 후반의 나이를 먹은 여자다.
무선 이어폰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안개꽃 속을 쉼 없이 달렸다. 안개꽃 속에서 소주의 알싸한 냄새를 남기고 달리는 기분에 뭔가 웃겼다. 술이 덜 깬 건 아니었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강을 건너면 보이는 그의 사무실 앞. 아직 이른 시간에 출근 전이겠지만, 혹시나 그를 볼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 멈춰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멍하게 그곳을 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통과하며 서늘하게 만든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가 부르면 뭐든 다 버리고 달려가고 싶을 만큼 그가 좋다. 나 자신도 버릴 수 있을 만큼.
행여 내가 남긴 저주에 걸려 밤새 사자한테 쫓겨 다닌 건 아니겠지?? 구해준다 해놓고 나는 일찍 일어나 버렸는데ㅠ 오늘 날이 따뜻해서 그의 손 끝이 마냥 차갑진 않겠지? 헤헤^^ 미지근한 그의 체온이 생각나버려 기분이 좋다. 출근을 위해 다시 왔던 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분명 이때까진 기분 좋았다.
빠르게 땀에 젖은 땀복과 속옷을 벗어 내리고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서 입에 물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몸에 뭐가 묻어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욕실에 있는 뿔테를 쓰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죽여버리겠다 진짜.
첫 남자가 남긴 밤꽃이 몸에 수놓아져 있었다. 잔소리 덕분인지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만....
왜 이제 본거지... ㅜㅜ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글 다 써서, 이제 그를 보러 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다 망했어.
망쳐버렸어. 샤워 후 몸크림 대신 멍 빼는 약으로 온몸을 발라버렸다. 보고 싶었는데 이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또 보러 못 가겠지? 어른 남자는 늙었으니 모르려나....?? 그래, 그는 늙은 사람이라 모를 수도 있다. 순한 사람이니까... 그냥 넘어져서 생긴 멍이라고 할까? 속아 넘어가줄까??ㅠ 안 속으면 어째 ㅠㅠ그런데 그러기엔 멍든 부위가.... 좀 이상하다고 하겠지?? ㅠ

결국, 허벅지가 드러나지 않는 긴 청바지에 목티. 그 위에 맨투맨까지 입고 영락없는 초딩처럼 출근길에 나섰다. 진짜 그에게 가는 길은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다. 연말에는 일도 많고, 약속도 많고, 강연도 많고, 김장도 있고, 운동도 가야 하는데 그에게 갈 시간이 있을까.... 안 간다고 그는 날 기다리거나 보고 싶어 하진 않겠지만, 늙은 그가 날 잊어버릴까 봐 걱정된다.
일찍 가도 늦게 가도 아주아주 늦게 가도, 늘 항상
"잘 지내셨어요?"
이 한마디면 끝인 늙은이. 밉다 진짜.
우리 삼촌도 조카를 길바닥에서 보면 몰라보고 지나가기도 하는데.. 늙은 그도 날 몰라보면 어쩌지?
하긴 뭐.... 그가 날 잊어버려도 난 그가 날 기억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럴 자신이 분명 있다. 그. 러. 나 그를 못 보고 지내야 할 내가 몹시도 걱정이다. 나 괜찮을까. 그를 안 보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밤꽃은 진하지 않다는 거다. 팔 안쪽 빼고는 짙은 붉은색이 아니다. 분명 첫 남자도 몸에 남길 때 놀래서 힘조절 한 것일 테지. 살고 싶었으면 아마도.... 다른 부위가 옅어지면 팔 안쪽에는 밴드 붙이고 가면 된다. 약 열심히 바르고, 달걀 굴리고 하면 금방 그를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딱 기다려라..!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그의 음성으로 들려준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듣고 싶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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