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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173 무채색을 닮았어요


그는 찬란한 사람이다.
화려하고 다채롭진 않지만, 어둠이 있기에 밝은 사람.
내 눈에 그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깜깜한 어둠이 와도 그 빛을 잃지 않을 것만 같은 어른..?
순하고 둥글둥글하면서도 강한 사람 같던 그는 알고 보니 노란색과 상아색의 중간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무채색의 남자였다. 무채색은 색감과 채도 없이 오직 명도만을 가진 색깔이다. 그는 무채색을 닮은 남자이다.
무채색은 흰색에서 회색을 거쳐 검은색에 이르는데 명도와 농도가 그와 흡사하다. 칙칙하다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무채색은 어느 색을 섞느냐에 따라 밝아지고, 어두워지니 모든 색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른남자가 칙칙하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무채색을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는 무채색은 모든 것이 잠든 밤처럼 차분하고,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포근하다. 담담하고, 무던한 어른 남자와 닮아있다.
그런 남자에게 사랑에 빠졌다. 정확히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불은 순식간에 붙어 내 온몸을 휘감았다. 펄펄 타오르는 불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내 눈은 이미 사랑에 취한 눈동자만이 휘청거리고 일렁이고 있다.
성냥팔이 소녀의 짧은 불빛은 진한 여운을 남겨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빠르게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만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성냥을 켜고 있다.  한 곽이 다 닳아 손 끝에 불길이 바짝 다가올 때면 그제서야 가슴보다 손 끝이 아프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이 정도 아픔은 참을 수 있게 그가 만들어놓았다. 손 끝이 불에 데어 깜짝 놀라 성냥을 떨어뜨리면 그때서야 그를 놓을 수 있을까.
손이 뜨겁게 데이고 있어도 놓지 못할까 봐 그럴까 봐 걱정이다.



달랐다.
다감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를 알면 알수록 그 속에 빠져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웅덩이 위로 튀어 오르듯 빗방울에 바지끝자락이 속절없이 젖어가는 것처럼.
낯선 그가 불안한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내 마음이 그에게로 자꾸만 흐르는 게 극도로 예민하게 여겼다.  불안은 초조함을 불러왔으며 초조함은 깊숙이 꺼내보지 않았던 감정들을 자극시켰다. 그리고 부풀어 오르는 무언가를 견딜 수 없었고, 풍선은 좀처럼 크기를 줄일 줄 몰랐으며 내 몸의 모든 숨구멍은 전부 막혀버렸다.
참지 못해 팡! 하고 터뜨렸을 때 흘러나온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터져버렸다. 주워 담을 수도 그렇다고 흘려보낼 수도 없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파편을 주워 담는 게 불가했으며,  내 안에서 쉬지 않고 부풀어 채워지는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 의미 없었다. 계속 채워지므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