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시 30분
강박인지 버릇인지 애매한 경계선상에서 9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보고 몸이 반사적으로 화장실로 향한다. 치약을 쭈욱 짜서 입에 물고 실내복과 속옷을 빠르게 벗어 내린다. 거울 앞에 섰다. 첫 남자가 내게 잔뜩 남긴 밤꽃, 키스마크는 더 이상 크게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왼쪽 팔에만 조금 보이는데 이건 파스 한 장이면 충분히 가릴 수 있고 이 정도면 그도 그냥 멍인 줄 알겠지. 입술 포진은 종합비타민과 면역에 도움 되는 걸 마구마구 먹었더니 괜찮아지고 있다. 그를 보러 갈 준비는 이제 끝났다. 샤워를 하는데 다리가 너무 아프다. 아마 슬리퍼 신고 산을 탔던 게 탈이 났는지 아팠던 부위가 더 아팠다. 처방해 준 약을 하나 먹고 자면 내일은 괜찮겠지. 스타킹을 신었음에도 다리 여기저기엔 모기가 많이 물려있고, 러닝을 하지 않음에도 살이 빠져 보였다. 내가 알기론 사랑에 빠진 여자는 예뻐지고 얼굴이 핀다는 데 왜 나는 왜 얼굴이 어두워지고 살이 빠질까.
빨리 보고 싶다. 그를 너무 오래 안 봐서 병이 생겼나보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보면 울 거 같단 말이지.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난 불안한 사람이니깐, 미리 핑계를 만들어 놓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선크림 때문에 우는 거다, 라식해서 눈이 시리다, 노안이 와서 그렇다?
하... ㅜ 내가 너무 그동안 그에게 솔직했구나. 노안이 시작된걸 그에게 말해버렸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그를 뼈저리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런 나의 치부는 말하지 않는 건데.. 그가 생각하는 나는 더 최악일 수도 있겠다. 노안이 시작된 여자의 고백..
아니지! 그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니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 그럴 것이여. 암! 난 그냥 그의 많고 많은 작가들 중에 한 명 일뿐이니 말이다. 뭔가 내가 적었지만 슬프다.
나 진짜 이대로 괜찮을까?
요즘 너무 뜬구름을 안고 사는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위태롭다. 구름은 만져지지도 않고, 분명 나를 통과할 것이 뻔한데 계속 뜬구름만 붙잡고 살고 있다. 결코 잡히지 않는데 말이다.
길지 않은 그와의 추억이 내게는 전부인데, 이 고작인 전부가 내 인생의 전부로 살고 싶어 진다. 욕심이 난다.
2024년, 훗날 그해여름은 내게는 사랑의 열병을 몹시 앓았던 해로 기억하겠지.
앞으로 그를 보러 가는 일은 내게 많지 않다. 그를 안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만 자꾸 보러 간다고 내 짝사랑의 결말은 다른 결과를 주지 않는다. 계속 그를 보러 갈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내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워서 못하겠다. 제대로 고백하고, 확실하게 대차게 차이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대조차 못하게.
마음은 모순덩어리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가 너무 좋은데 막상 보면 자꾸 눈을 피하게 된다. 이제 들켜도 되니깐 피하지 말자고 나를 세뇌시켜 본다. 나 혼자 하는 사랑이라고, 반쪽 자리 사랑이라고, 그 크기까지 반쪽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단언컨대 내 사랑은 결코 작지 않다. 이리도 시린 마음으로 그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서 그를 몹시 앓고 있는 게다. 온통 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 없이 행복하다 대답할 것이다. 끝이 정해진 사랑에 슬픈 일이지만,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 벅찼으니 말이다. 내 큰 사랑을 그에게 다 보여주기엔 고백이 너무나 작지만, 나는 이 고백이라도 내 마음을 전하려 한다. 고백 말곤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나는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숨 좀 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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