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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6 비에 젖은 마음


"악!!!!!!"
"미안해요. 놀라셨어요?"

이어폰에서 한참 <최성수-해후>를 볼륨 높여 들으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 나를 잡은 건 다름 아닌 아기 아빠였다.

"왜.. 어디 가세요...? 우산 없어요?"
"아... 안녕하세요. 뛰고 왔어요"
"이 비에???????"
"네"
"그러다 감기 걸려요"


그의 우산이 내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얼른 그에게로 우산을 밀었다.

"이미 다 젖었어요"
"감기 걸려요.. 얘들은요?"
"자요. 남편은 집에 있고요. 저 멈추면 추워서 먼저 가볼게ㅇ.."
"아니 우산 같이 써요!"
"괜찮아요, 그럼
"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뛰려는 나를 붙잡았다.

"아니, 그럼 우비를 입고 뛰지 그랬어요. 아직 추운데"
"괜찮아요"


내 걸음에 맞춰 그가 빠른 걸음으로 우산을 기울이며 걸어왔다. 그에게서 술남새가 났다. 우산 안으로 스며드는 진한 소주향.
나는 걸음을 늦췄다.

"술 드셨나 봐요?"
"아, 불금이라 한잔 했습니다^^"
"아.. 네"
"아! 그때 알려주신 청포도랑 소주는 아닌 거 같습니다. 사탕은 너무 달고, 소주는 너무 쓰고 소주 안주로 안 맞아요"
"전 너무 달고, 너무 쓴 맛이 좋아서요"
"아!"
"^^;;;"
"역시 작가님이시라 그런지 좀 다르시네요"
"뭐가요?"
"뭔가 달라요. 느낌이"
"칭찬이죠?"
"네 당연하죠"
"^^"
"근데 얼마나 뛰신 거예요? 완전히 쫄딱 다 젖으신 거 같은데?"
"몇 시예요?"
"10시 30분이요"
"1시간 조금 넘게 뛰었어요"
"아이고.. 큰일 나요. 남편이 별말 안 해요?"
"자주 있는 일이라..."
"아... 자주.. 비 좋아하신댔죠?"
"네"
"아참, 요즘 아침에 전혀 안보이시던데요? 얘들도..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첫째가 아파서 당분간 가정보육 중이에요. 둘째도.."
"힘드시겠어요..."
"저 다 젖어서 우산 필요 없어요. 그쪽 쓰세요. 저랑 같이 쓰면 다 젖어요"
"사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이미 젖었어요. 그나저나 안 추우세요?"
"조금 추운데 좋아요^^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씻고 자면 돼요"


이 이야기를 끝으로 그와 나는 대화가 없었고, 그의 소주 냄새가 내 안에 스며들었다. 우산 위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축축한 촉감도, 차가운 빗물도 눈치 보지 않고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비를 맞고 다니는 아줌마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충분히 이상하게 보이기에. 그럼에도 나는 뛸 수밖에 없었다. 나의 내면의 평화를 찾는 길은 달리기인지라.. 그중에 우중러닝은 너무도 완벽한 힐링이니까. 용기를 낼 수밖에.

아파트 현관 입구까지 그는 말이 없었고, 우산을 접었다. 나는 홀딱 젖은 옷을 비틀어 짜기 시작했다. 짜도 계속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짜고 가야 하기에.. 밝은 곳에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고, 그는 볼이 붉으스럼했다. 술에 취한 모습이었고, 분명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듯했다.

"입술색이 시퍼런데요? 괜찮으세요?"
"네^^;;"
"다 젖었는데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요?"
"ㅋㅋㅋㅋ 신발장에서 욕실까지 가는 길에 수건 깔아 두고 왔어요"
"대단하세요ㅋㅋㅋ 전 귀찮아서도 못하겠네요"
"이제 적응이 돼서 괜찮아요. 저 때문에 많이 젖으신 거 같은데.. 오늘도 그렇고 그때도"
"괜찮아요. 추운데 어서 들어가 보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스락 거리는 소재의 바지는 비에 젖어 몸이 그대로 비쳤고, 일부러 품이 넉넉한 하얀색 박시티를 입었음에도 홀딱 젖어 속옷 모양까지 비치고 있었다.

살금살금 욕실로 향했고, 바지는 겨우 벗었지만 박시한 티는 비에 젖어 도무지 벗겨지지 않았다.

"오빠ㅠㅠㅠㅠ 자??? 오빠??? 오빠????"
"왜에..?"
"옷 좀 벗겨줘"
"너 이러고 뛰었어?"
"응"
"미쳤어??? 검은색을 입었어야지"
"깜빡했어"
"으이고!!! 뒤돌아서, 만세"
"고마워~^^ 얘들 안 일어났지?"
"응 잘자더라"
"오빠, 먼저 자"
"나도 같이 씻을까?"
"아니. 나 욕조에서 시집 읽고 나갈 거야. 먼저 자^^"
"치, 알았어 빨리 와 재워줄게"
"응"


나는 슬펐고, 공허했으며, 무의미했다.
비에 흠뻑 젖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으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은 비에 젖은 줄 알았으나, 그리움에 잔뜩 젖어있었다. 나의 힐링은 빗속에서 달릴 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