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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육아일기

엄마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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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만 둘이다.
주변에서 '딸 둘은 금메달, 딸과 아들은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이 우스갯소리는 남아는 딸보다 힘이 세고, 활동적이다 보니 키우면서 육체적으로 힘들 거 같아 이런 말이 생긴 것 같다.
이 말 말고도 상처가 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딸 엄마는 부엌에서 죽고, 아들 엄마는 문 앞에서 죽는다' 처음 이 소리를 듣고,  나의 마지막이 너무도 비참하게 예상되어 몹시 속이 상했다. 아들이 둘이라고 하면 안쓰럽게 쳐다보거나 엄마에겐 딸이 있어야 한다며 셋째를 권유하기도 한다. 처음엔 이런 말들과 반응에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의 오지랖 조언을 듣게 되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이제 그 정도는 웃으며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그러나 오지랖 조언을 넘어 훈계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신다. 이를 테면 엄마 손을 잡고 가는 나의 예쁜 아이들에게 '너희들!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엄마가 너희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겠니' 하시며 혀를 끌끌 찬다. 조선시대나 옛날이었으면 아들 둘 낳은 나는 선망의 대상이었겠구먼,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인지 나를 안타깝게 보는 시선들이 불편하다. 또한 그 말에 혹여나 나의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마음이 불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작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가 괜찮다는데 말이다.






올해 다섯 살 유치원생이 된 둘째는 엄청난 에너지와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섬세하고 예민한 나를 닮은 면도 있지만, 본래의 쾌활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라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첫째와는 또 다르므로.
첫째, 둘째 모두 언어발달이 빠른 편이다. 이제 초등학생인 첫째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어느 정도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아직 어린 둘째는 생각지도 못하는 돌발 행동뿐만 아니라 '5살 아이가 저런 표현을 하지?' 싶을 정도로 표현력으로 어른들을 당황시키는 일도  많다. 그런 천방지축 장난꾸러기 둘째가 다쳤다.



아이가 다쳤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 눈앞에서.
수요일 오후 8시쯤, 아이들을 씻기기 위해 욕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신이 난 둘째가 빙글빙글 돌며 가던 중 중심을 잃고 넘어져 서랍장에 귀를 부딪혔다.
순간이었다.

"악!!!!"

짤막한 비명과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용수철처럼 아이를 바로 안아 상처를 확인했다. 아이의 귀 옆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 선명한 피는 목덜미를 타고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남편이 야간 근무 때 일이었다. 아이를 안아 손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아이를 진정시켰다. 놀란 첫째는 토끼눈으로 눈물을 가득 채운 채 내 휴대전화기를 들고 왔다. 그러면서,

"엄마,  119에 전화해 빨리"

운전해서 병원을 가는 것보다 그 편이 나은 듯싶었다. 119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제는 울고 있는 아이와 놀란 첫째를 진정시켜야 했다.

"괜찮아. 놀다 보면 다칠 수 있어. 괜찮아. 내일은 더 많이 크려고 그러나 보다 괜찮아, 괜찮아"
"너도 놀랬지? 괜찮아. 이제 피도 멈췄고, 119 아저씨들 오시면 동생 안 아프게 치료해 주실 거야. 걱정 마"

그 사이 다행히 피가 멎었고, 아이의 눈물도 점점 진정되었다. 놀란 아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상처를 보았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상처부위가 찢어진 것은 분명해 보여 봉합은 해야 될 듯싶었다. 곧이어 초인종이 울렸고 첫째가 문을 열어주었다. 구급대원 세분이 오셔서 아이 나이와 이름, 다친 이유에 대해 물으셨고, 다른 한분은 둘째를 안아 진정시키고, 한분은 아이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친 데다 피까지 나서 이미 놀랬는데 거기다 낯선 구급대원이 세 명이 와서 울음소리는 다시 커졌다. 구급대원이 아이를 진정해야 처치한다며  다시 내 품에 안겨주었고, 둘째는 불안했는지,

"엄마 찌찌, 찌찌 찌찌 엄마 찌찌"

새파랗게 어린 구급대원 세분의 남자가 바로 코 앞에 있었지만, 나는 엄마였다. 아이는 가슴에 손을 넣고서야 싫다고 온몸으로 거부하던 몸은 서서히 진정되었고 울음도 잦아들었다. 처치 중에도 아파를 외치며 힘을 주고 처치를 방해했다. 결국 옷을 들추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서야 소독을 하고 상처부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상처는 깊진 않으나 봉합은 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바로 구급차를 타고 봉합하러 가는 줄 알았으나, 두 명의 구급대원은 아이 봉합을 해줄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몇 통의 전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받아주는 병원이 없다였다. 아, 한 곳은 있었으나 수면마취를 위해 4시간 금식해야 한다나? 그러나 아이가 저녁 식사 후 배고프다고 해서 간식을 막 먹었던 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소독하고 거즈로 상처 부위에 붙여주기만 하고 가버렸다.



소아를 받아주는 응급실이 없다는 내용을 실제로 경험했다. 구급대원은 구급차로 병원 이송하지 않을 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며 내 이름 석자 적은 태블릿과 구금함을 들고 갔다.
가기 전에 거즈가 떨어지면 새로 붙이라고 멸균거즈 2개를 두고... 가는 구급대원을 배웅하러 아이를 안고 뒤따라가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 탓인지, 아이가 많이 울거나 아파하면 다른 지역이라도 이송해 주겠다며 전화하라고 했다. 그렇게 첫째의 인사와 나의 눈물 젖은 인사를 받은 구급대원은 갔다.



근무 중인 아이 아빠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전달했고, 뒷날 아침 퇴근을 빨리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한다고 했다. 첫째는 학교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다친 아이를 밤새 안고 울었다.
많이 놀랬던 탓인지, 많이 운 탓인지 아이는 내 품에서 곤리도 잤다. 첫째도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몇 번 지나지 않았는데 잠에 들었다.

아이 대신 아파주지 못한 부모들의 가장 가슴 아픈 말,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나는 다친 아이를 안고 한참을 '엄마가 미안해'를 곱씹으며 자책했다.

'대신 아파주지 못해 미안해'



뒷날 아침, 남편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둘째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등교하는 첫째와 퇴근한 남편의 아침을 차려주었다. 9시 되어야 진료를 볼 수 있기에... 그리고 또 수면마취를 해야 해서 4시간 금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둘째는 깨우지 않았다. 나는 먹을 수 없었다. 밤새 품 안에 안고 울었지만,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으니깐. 이 와중에도 깨서 배고프다고 우는 우리 먹보 둘째. 마음이 아팠다. 다시 업어 배가 고프지 않도록 달래고 재우는 거 외엔 방법이 없었다. 첫째 등원시간에 맞춰 다 같이 나가 등교시키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어리기에 수면마취를 해야 하며 당일 입원 하자고 했다. 팔에 주사를 꽂았지만, 울지 않는 용감한 아이였다. 엄마보다 강한 아이였다.



간단한 봉합수술이지만, 수술대에 눕혀 놓고 나오는 엄마의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고, 무서웠다. 아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바로 앞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남자아이 키우면서 다치고 넘어지고 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나는 늘 아이가 다치고 아픈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종교도 없는 나는 혼자 울었다.



마취가 덜 깨어 헛소리와 나도 못 알아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얼마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마취가 덜 깨어 낙상이나 머리를 받쳐야 된다고  간호사가 신신당부해 주었고, 나는 하루 종일 자지도 먹지도 못해 아이를 안고 있기 힘들었다. 야간을 하고 온 남편은 자야 하기에 집에 보냈다.

'힙시트라도 들고 올걸...'

손에 자꾸 힘이 빠졌고, 아이는 점점 마취가 서서히 깨면서 움직임이 컸다. 결국, 친정부모님께 전화했다. 근처라 진짜 금방 오셨다.

"많이 놀랬겠네. 넌 괜찮아?"


봉합 후 3시간 금식하고 죽 먹고 퇴원했다. 매일 통원해서 상처부위 소독하고 흉터 생기지 않고 관리받아야 한다고 했다. 통원 첫날, 간호사 선생님들이 링거 주사 맞을 때 울지 않은 최초의 아이라며 각종 칭찬과 예쁨을 한껏 받으며 처치해 주셨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아무런 일 없이 평범한 하루가 어쩌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평온을 당연시 여기면 안 된다고, 평범한 일상을 감사하며 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떼쓰고 고집부리는 아이에게 눈을 흘기며 아이와 전쟁을 치렀다.
아마 이번 계기로 아이와 나도 한 뼘 자랐을 것이다. 상처가 남을 수도 있지만, 아이의 살은 더 단단하게 붙을 것이다. 말괄량이, 장난꾸러기 아들 둘을 키우며 손끝 하나 다치치 않고 키워낼 거란 기대 한 적은 없다. 더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비싼 값을 치르고 교훈 하나를 얻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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