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워드릴게요"
아는 사람이건, 낯선 사람이건 남자 차는 절대 타지마라...
평생을 듣고 살았다. 누구에게나 만만해 보이는 내 얼굴이 항상 못마땅하셨던 아빠는 서른 후반임에도 걱정하신다. 그럴만한 이유는 다분했다. 10대 후반에 일이었다. 하복을 입고 있을 때였으니 여름날에 고등학생 때 일이었겠다. 하교 후 도서관에 들려 빌린 책을 반납하고 집에 가던 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워낙 비를 좋아하는 탓에 이미 잔뜩 맞아 우산을 사기에도, 그렇다고 젖은 몸으로 버스를 타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가방을 안고 집에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걷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 검은 세단차가 멈추더니 날 향해 고함을 쳤다.
"학생, 비 맞고 어디가?"
안경 위로 내리고 있는 비로 고함치는 상대가 누군지 식별되지 않았고, 직감으로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날 부르는 게 아닌가 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차는 불법유턴을 하고 비상깜빡이를 켜 내 걸음에 맞춰 차로 따라왔다. 몹시 불편했고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누구세요?"
"학생, 우산 없어? 비 맞으면 감기 걸려. 타. 태워줄게"
"아뇨. 괜찮아요"
"감기 걸려. 얼른 타!"
대답하지 않고 나는 내 갈길을 갔다.
다시금 내 걸음에 맞춰 차로 따라오며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도 딸이 있는데, 비 맞고 들어오면 그렇게 속상하더라. 그러지 말고 타. 딸 같아서 그래"
'딸 같아서 그래'이 한마디에, 우리 엄마아빠도 비 맞고 오면 많이 속상해하시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잔뜩 경계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럼에도 낯선 차를 타는 건 결벽이 있는 나에겐 힘든 일이었고, 딸이 있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풀어진 경계를 부여 잡고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 이차선 도로를 내 걸음에 맞춰 비상깜빡이를 켜고 따라오는 통에 뒤에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불편했다.
"아저씨가 가방도 사주고, 용돈도 많이 줄게. 어서 타!"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돈을 준다니... 이 한마디에 나쁜 사람이 맞는구나라고 생각 들었다. 아저씨가 차에서 내렸고, 내게 오는 게 빗물에 시야가 흐린 안경을 통해 보였다. 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휴대폰을 꺼내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이 세단 차 뒤에 있던 태권도 운전석에서 도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고, 내게 물었다.
"학생, 저 사람 아는 사람이야?"
너무나 안심이 되는 한 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몰라요. 처음 보는 아저씨예요"
"괜찮아??"
비를 맞으며 세단 아저씨는 씩씩 거리며 내게 왔고, 도복 입은 젊은 사람도 내게 빠른 걸음으로 왔다. 멍하게 있는 날 팔을 잡아당겨 뒤에 세워두고는
"뒤에서 다 봤는데, 지금 학생한테 뭐 하는 겁니까!? 예??!!"
그 세단 아저씨는 그제서야 주위에 사람들이 보였는지 차에 타려 했고, 도복 입은 젊은 사람은 도복 입은 학생들에게 차량 번호를 메모하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검은색 세단 차는 도망치듯 빠르게 사라졌다. 도복 입은 남자는 운전석에서 도복 하나를 들고 와서는 내게 걸쳐주려 했지만, 그 움직임이 너무 커서 움츠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안심해. 나 나쁜 사람 아니야. 속옷이 비쳐서 덮어주려는 것뿐이야"
"감사합니다"
"집에 데려다줄게. 너 혼자 타는 건 아니고, 다른 얘들도 많으니깐 안심해. 집에 데려다줄까? 경찰서로 갈래?"
"집에 가고 싶어요"
이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였다. 눈을 떴을 땐 응급실이었다....
아빠의 얼굴에는 살기가, 엄마의 얼굴에는 눈물이 범벅이었다. 그 옆에는 도복을 입고 있는 젊은 운전사가 보였다. 눈을 뜬 걸 확인하고 병원 이불을 들추고 아빠의 얇은 외투로 나를 감싸 안아 들었다. 곧장 차로 향하는 듯했다.
"아빠 어디 가?"
"그 새끼 죽이러"
"아빠 나 괜찮아ㅠㅠ"
내가 자는 동안 경찰이 다녀갔다고 엄마가 이야기해 주셨다. 그러나 나를 납치한 것도, 강제로 끌려간 것도 아니기에... 아무 일도 없었기에 죄가 크지 않다는 말에 아빠가 뚜껑이 단단히 열리셨다ㅜ
엄마가 불같은 아빠를 뜯어말리셨고, 나는 병원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아까 그 도복 입은 젊은 사람이 보였다.
"아빠엄마 나 저분한테 감사인사 하고 올게!"
하고 달려갔다.
"아까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연락처 주시면 아빠가 사례할 거예요... "
"아니야 사례 같은 거 필요 없어. 다음부터 그런 사람 만나면 아무한테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던지, 상대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냅다 달려"
"네 그럴게요. 혹시 저희 아빠한테 차 번호 알려주셨어요?"
"아니 아까 너 하얗게 질린 거 보고는 알려드려야지 하고 적어놓으라고 했는데 알려주면 안 되겠더라"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알려주지 마세요. 아빠가 진짜 죽일지도 몰라요ㅠ"
이 에피소드 말고 하나 더 있었다.. 그런 뒤로는 아빠의 걱정은 점점 더 심해지셨고, 지금은 간간히 이야기하신다... 아빠 눈엔 여전히 내가 그때 그 고등학생인 줄 아시나 보다.
#현재
"태워다 드릴게요"
분명 예외는 존재한다. 아마 나는 그가 네게 독약을 건넨다 해도 그 자리에서 바로 마실 것이 확실하다. 사랑에 빠지는 건 목숨을 건 일이다. 어쩌면 낯선 사람이고, 어쩌면 아는 사람이 어른 남자 '그'라서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뭐든 할 수 있다.
추위를 많이 타지만, 두꺼운 점퍼나 롱패딩을 입으면 움직이기 둔하고, 갑갑하고, 불편하기에 차라리 추위를 참아보자는 편이다. 그날도 일이 많아 동선이 복잡해서 롱패딩을 사무실에 벗어두고 그에게 갔다. 그런 내가 그의 눈에 추워 보였 나보다... 그가 집에 바려다준다 말했다. 그 짧은 시간이 몹시도 행복하고 소중했다. 그의 온기가 잔뜩 묻어있는 공간에 그와 단 둘이 있다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으니까. 금방 도착해 버리는, 집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깐.... 온통 그의 체취들이 묻어나는 곳에서 내리기 싫었다. 그의 뒤통수를 보는 것도, 삐죽하고 혼자 튀어나오는 머리카락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냥 왠지 웃음이 나왔다. 마냥 좋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좋다.
내가 사랑한다고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아도 그에게선 어떠한 답도 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정말 좋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내 마음이니 내 마음대로 그를 좋아하고 사랑할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까지는 말이다.
그를 보지 못한 시간이 너무나 길었고, 그를 보러 갈 날이 앞으로 너무 많이 남았다... 혹시 그가 날 까먹거나 잊어먹지 않겠지??ㅠ 그러면 안 되는데...
근데 그가 너무 늙어서 깜빡깜빡할 수 있는 나이라서.. 그게 걱정이다;; 곧 있음 그도 한 살 더 먹을 텐데 그럼 진짜 반백살에 다가가는 건데.... 언제 자기 혼자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걸까 ㅠ
그가 너무도 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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