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단지 동경한 것,
그저 단지 염선한 것,
그저 단지 좋아한 것,
그저 단지 사랑한 것,
내가 그에게 하는 것들이다.
고작 이것밖에 없다.
고작 이것이 전부다.
곧 고작 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나에게서 소중하게 빛나던 것들이
더 이상 빛나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결국,
당신을 채운 흔적들과 추억들로
나는 텅 비어버리겠지.
나는 허무하게 잊히겠지.
'잊혀지겠지'라는 말에
심장이 텅 비어진 듯
호흡이 멈춘 듯
가슴 중앙에 구멍이 생겨
깊은 곳을 후벼 파는 아픔이 느껴진다.
흔적과 추억 안에서
그때 당신과의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그때 말갛게 웃는 당신 얼굴이 잊혀질까 두려운 것인가.
그때 당신의 미지근한 손길을 닿을 수 없어 두려운 것인가.
그때 당신에게 받은 위로와 배려들이 느낄 수 없어 두려운 것인가.
뭐가 두려운 것이길래
나는 당신을 비워낼 수 없는 걸까.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는 일에는 오감을 전부 사용해야 하니까 섬세하고 세심한 작업이다. 그를 바라보고, 그의 소리를 듣고, 그의 살냄새를 맡고, 그를 만지고, 그를 맛보는... 사랑하는 일에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감각들이 없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빠뜨린 채 사랑을 한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 일리가 없다. 사랑을 처음 해봤지만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눈으로 기억하고, 코 끝으로 살냄새를 기억하고, 귓가에 스며드는 달콤한 목소리를 기억하며, 미지근한 체온을 손끝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맛보고 맛보아도 배부르지 않은 것이 사랑하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 그를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가장 진하게, 가장 많이 사랑할 수 있으면... 내 남은 생을 전부 써가며 사랑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뤄지지 않을 사랑.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랑임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뻔히 결말을 아는데도 그만둘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들이 사랑을 꿈꾼다. 어리석게도. 바보같이.

#금요일 저녁
쌀쌀한 밤거리,ㅛ 입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카카오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이 맘 때쯤이면 송년회가 한창이다. 한 해의 마무리를, 다가올 새해를 위해 모인다고 하지만 사실상 모두 술판이다. 얼마 전 오프너 6개 챙겨 온 해프닝으로 술자리는 못 가게 하는 첫 남자를 구슬려 나오기까지 진짜 힘들었다. 단체 회식마다 일이 생겨 이번 송년회만큼은 빠지면 안 된다는 오너의 말에 못 간다 말할 수 없었다. 준비해서 나오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많이 꾸미고 나왔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첫 남자 눈에는 나의 외출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크롭티 안돼, 치마 안돼, 원피스 안돼, 숏팬츠 안돼, 몸매가 드러나도 안돼... 결국 첫 남자가 골라준 옷을 입고 나올 수 있었다. 연한 청바지에 화이트색의 얇은 거디건,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연베이지 코트에 부츠. 마지막으로 엄청 긴 목도리까지.
"과장님! 여기에요!!!!!!"
"한참 기다렸잖아요ㅠ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날 반기는 젊은 친구들. 1차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내가 도착할 때는 2차 호프집이었다.
"이제 다 모였네. 자, 박 과장 건배사로 송년회 시작할까?"
"제가요?? 싫어요"
"다들 잔 들고, 박 과장은 멘트 날려"
"나빠!!! 맨날 만만한 게 나야!! '석 잔만'하면 '마시자' 외쳐주세요"
"넵"
"한잔은 나를 위하여, 또 한잔은 당신을 위하여, 나머지 한잔은 저물어가는 젊음을 위하여. 석 잔만!"
"마시자!!!!"
술잔을 높이 들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건배사를 외치고 다 같이 맥주를 마셨다. 나는 한 모금만...
"과장님 건배사는 매번 무슨 시인 같아요"
"그래??ㅋㅋ 다음엔 신경 써서 와야겠네"
내 옆자리 직원이 콜라를 들고 내게 오며 말했다.
"술 못하잖아요, 콜라 드실래요?"
"아니, 안 마실래"
"화장실이 걱정이에요, 살이 걱정이에요?"
"둘 다 ㅋㅋㅋㅋ"
"청바지에 흰 티가 잘 어울리면 날씬한 거예요. 그리고 화장실은 안되면 제가 가드릴게요"
그렇게 콜라와 맥주를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송년회가 무르익었다. 2차가 끝나고 3차는 사무실 오너들이 빠지고 젊은 사람들끼리 놀아라고 카드만 주시고는 유유히 떠났다. 남은 직원들이 막상 젊지도 않은데 말이다. 3차는 언니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가라오케로 향했다.
다른 손님들도 붐비는 가라오케가 내게는 조금 불편했다. 아마 덜 취해서 더 그런 듯 싶다.
테이블마다 부를 노래를 신청하는 종이가 있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언니가 스페이스에이-섹시한 남자를 불렀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나와 쿵짝이 맞는 동생과 한참 신혼 일상을 들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과장님은 오늘 술도 안 마시고 이렇게 혼자 안 취하기 있기 없기?!"
"미안, 나 오늘 많이 안 마시기로 약속해서"
"야 그런 게 어딨어 송년횐데! 잔 들어 건배하고 원샷!!"
언니들의 성화에... 고민하던 차에 흑기사를 자처한 내 옆자리 짝꿍! 그는 나 대신 마신 술로 노래를 원했다.
엄정화-포이즌
취기가 조금은 오른 듯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노래가 끝나갈 때쯔음 모르는 사람들이 앙코르를 요청했고 디제이? 분도 한곡 더 부르면 서비스로 뭘 준다길래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를 부르고 자리에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맥주로 목좀 축이라고 잔을 권했지만, 사무실 언니들이 날 불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찔끔찔끔 마신 맥주에 취기가 단단히 올랐다.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웃음이 헤퍼지고 내성적인 성격이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응!^^"
"아닌 거 같은데요?"
"딱 기분 좋아. 괜찮아"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요?"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으면 입 돌아가"
"그럼 커피 한잔 하러 나갈래요?"
"아니, 조금만 있다가 집에 갈 거야"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옆자리 짝꿍은 술 취한 내가 그리도 걱정되었나 보다. 더 이상 졸려서 안 되겠다며 언니들한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꿍도 함께.
깜빡한 긴 목도리를 내 목이 칭칭 감아주는 짝꿍.
잠시 술 좀 깨고 택시 타자는 권유에 너무 춥다고 서있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우리 집 먼저 갔다가 다시 그의 집으로 가 달라는 요청에 그제서야 택시가 움직였다. 짝꿍의 배려가 조금은 불편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분명 아니었으니까. 조금은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와 가방에 오프너는 없었고, 나는 적당히 취해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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