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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77 그의 잔향



그와의 모든 만남들이 카펫에 쏟아버린 향수의 잔향처럼 아른아른 피어오른다. 창문을 열어두기도, 세탁을 하기도 하지만 좀처럼 그의 잔향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선한 눈을 가진 그가 웃으면 눈꼬리가 처지는데, 그 쳐진 눈가에 연륜이 묻어난다. 그의 웃음이 잔상이 되어 날 괴롭힌다. 웬만한 작은 일 따위는 동요하지 않고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을 지닌, 마흔을 훌쩍 넘은 성숙된 어른 남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연륜이 잔상이 되어 날 그립게 한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의 미지근하고 보드라운 손길이 아직 내 몸에 남아 그 흔적이 잔상이 되어 날 외롭게 한다.
사실 나는 향수가 쏟을 때부터 이미 알았다. 이 사랑은 잔향이 오래 남겠구나. 이 사랑으로 오랫동안 내가 아프겠구나. 지울 수 없는 그의 잔향에 몹시도 힘들겠구나.
지금도 그의 잔향은 내게 머물고 있고, 나는 그의 잔향을 몹시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잔향이 짙게 내 코에 남아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아 여전히 선명하다.
시간을 붙잡아 두면, 그 시간만큼은 그를 나에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가 잠시라도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이 왜 이리도 자꾸만 커지는지 알 수가 없다.
빈틈없이 그가 보고 싶다.
그는 절대 모르겠지.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겠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듣던 말이 있다.
"물러터지기만 하고, 영 여물지 못해"
날 표현하는 정확한 표현이다. 어렸을 땐, 욕심 없는 나를 보고 종종 어른들은 나에게 저런 말을 하셨다. 어린 나였어도 그들의 말에 가시를 숨기고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부족함 없이 살아서 저 모양이지'라는 말이 뒤에 숨어있다는 정도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정확했다. 나는 욕심내지 않아도 가질 수 있었고, 행복을 찾기보단 행복을 기다려 받기만 했다. 나는 그렇게 컸다. 그렇게 나는 중년이 되었고, 지금의 나는 그때 그대로다. 행복을 찾기보다는 불행을 피하기 바쁘게 살고 있다. 그에게로 가는 내 사랑에 그는 반응이 없다. 알고 시작한 일임에도 자꾸 바라게 된다.
나는 여전히 무른 마음에 그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다. 무르기보다 단단해지자고 그러자고 다짐하는데, 쉽지가 않다.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그는 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미련해 보이지만, 나는 또 피하고 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바쁘고 더 바쁘게 살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날 밝으면 조금 더 바쁘게 움직여보자.
이러니 몸이 안 아프고 배기겠는가
사랑 두 번만 했다간 과로로 단명할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