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글이 너무 안 써지는 어느 날이었다.
내 이름 석자를 종이에 썼다. 내 이름 석자, 거기에는 나에 대한 본질은 없었다.
작가로서의 나, 누구의 딸, 누구의 여자.. 나는 없었고 껍데기만 있었다. 한 여자로서의 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다들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위로했으니깐. 나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나는 아직은 젊은이 가시지 않고 내게 머물러있음을 보고 나는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외로웠고, 30대 중반이라는 내 나이가 아까웠다.
그때 마침, 내게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이 틈을 채우려 러닝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작년 가을이었고, 그를 만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는 나를 작가님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너무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누군가를 만나 반가웠고 좋았다. 내 이름 석자에 가진 부족함을 그가 채워주었고, 그는 점점 여자로서의 행복을 내게 마구마구 주었다. 그렇게 내가 제일 약할 때 무방비 상태에서 오는 그를 막을 이유도 없었고, 그만 보러 갈 이유도 없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많이 움직인 만큼 살은 빠졌고 뚱뚱하지 않았던 몸으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나는 그에게 갈 준비를 한 모양이다. 나는 다들 나를 똑똑하다고 영리하다 해서 내가 그런 줄 알았다.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하는 유치한 것들이 내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감정 유희라고 치부하고 하찮게 생각했다. 내가 내 발등 찍었다.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겠다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위험하다. 나에게서 그는 도망가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쫄보에 겁쟁이에 내성적인 사람이다. 도망은 천천히 가도 된다 ㅜ 아니지,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 잡을 수 없으니 도망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잡을 용기가 있었음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서 그가 없어지면 난 어떻게 살지? 그를 내게서 보내고 다른 이를 채워야 하나 아니면 내 첫 남자로 억지로 끌어다 채워야 하나. 뭐가 됐든, 자신이 없다.
그를 안 보러 갈 자신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고백 후 갈 핑계와 명분이 내게는 없다. 나는 가진 게 많은 여잔데 그 앞에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내가 되어버린다. 이제 와서 그가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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