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9 내가 있어야 될 자리

#오후 9시 30분
샤워를 마친 후 소가 도살장 끌려가 듯 아직 쓰지 못한 소설을 쓰기 위해 서재실로 향했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펜을 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불러도 왜 대답이 없어!"
첫 남자가 내게 쏘아붙이 듯 말했고,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벌떡 일어서서 그 자리에 몸이 굳어버렸고, 그를 향해 눈만 흘기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첫 남자는
"놀랬어? 미안, 대답이 없길래 어디 간 줄 알았어"
"못 들었어. 근데 왜 불렀어?"
"야식 먹자고 ^^"
"싫어!!"
나는 단호하게 싫다고 대답했다. 곧이어 그는 내 의자에 앉더니 나를 무릎에 포개어 앉게 했다.
"그럼 나랑 놀자"
등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글 써야 돼"
"나 심심한데. 그럼 영화 볼래?"
"아니, 글 써야 해"
"그럼 우리 할래?"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눈을 보고 거절하는 게 맞는 듯하여 그를 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오해를 한 그는 "사랑해"라고 말한 뒤 내 안경을 벗긴 손이 그대로 잠옷 속으로 들어왔다. "아니 잠깐만"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목에 그의 입술과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 또 생길지 모를 밤꽃이 떠올라 그의 무릎에서 튕기듯 내려왔다.
"잠깐만! 우리 야식 먹자. 나 갑자기 배고파"
"갑자기? 하고 먹자"
"그럼 술 마시고 하자"
첫 남자는 내가 술을 찾는 이유를 아주 정확하게 안다. 무섭거나 용기가 없을 때 불안할 때 찾는 자기 방어태세다. 맨 정신으로는 못할 때 술의 기운을 빌리는 걸 너무 잘 아는 그에게 내뱉고 말았다.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임을 뱉고 나서 알았다.
"왜? 무서워?"
"그게 아니라, 내 몸에 아직 멍이 선명해서. 없어지고 나면 하자"
내 말에 신빙성을 위해 단추를 풀어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아파?"
"조금 아파"
사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 밤꽃은 멍이 생길 때만 입술의 압력에 의해 아플 뿐이다. 그러나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것임에.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잠시만 기다려"
그가 갑자기 서재방을 나갔고 곧이어 구급약통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벗어봐, 발라줄게"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게"
"내가 그런 거잖아. 내가 발라줘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그리고 뒤에는 어떻게 바를래? 그냥 벗어"
"창피해"
"그럼 내가 벗겨줄까?"
그 말에 잠옷을 벗었고, 아프지도 않은 자국에 아플까 봐 조심히 발라주는 그의 손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고를 발라주고 나간 그와 서재방에 홀로 남겨진 나.
내가 있어야 될 자리에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어디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