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98 상냥하게 굴게요

#따갑지 않은 투명한 시선으로
이상하게도 약을 먹었음에도 잠이 들지 못했다. 창밖은 어두웠고, 거실은 고요했다. 세상이 숨을 죽인 듯, 오직 나만이 깨어 있는 시간.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따뜻한 핫초코미떼 찻잔을 들고 책상에 조용히 앉았다. 아끼던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책을 읽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첫 문장, 첫 줄에서 계속 맴돌 뿐이었다.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간식창고에 있던 미지근한 팩소주 한팩과 사탕을 꺼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잠시 고민해야 했다. 잠을 자려면 술을 마셔야 했으므로... 그러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맑고 투명한 이 액체는 순수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맛을 가졌다. 있는 힘껏 빨대로 들이킨 소주의 맛은 굉장히 쓰고, 식도가 타들어갈 듯 따가워 빨아들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힘껏 빨아들이는 횟수가 두 번이면 충분히 기분이 좋아지고, 온 세상만물이 아름답게 보였던 나는 유독 이날은 취하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해가 뜨면 그를 보러 가기 때문이었다.
수면제와 알코올은 상극이긴 하나 잠이 들기에 최고의 궁합이다. 그럼에도 나는 밤을 꼬박 지새웠다. 의자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세상이 핑 도는 느낌, 땅이 울렁거리는 느낌, 몸은 취했으나 정신은 말짱했다. 그를 보기 위해선 몸과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야 했다. 온 마음을 써도 그 앞에서는 고장 나버린 장난감이기에..
차가운 물에 연거푸 세수를 하고, 편안한 옷을 입고 강변을 나왔다. 우습게도 강변에 나오면 내 발은 이끌리듯 그의 사무실 앞으로 달렸다. 아직은 불 꺼진 사무실. 그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거리였고, 아직은 깜깜한 사무실을 왜 그렇게 넋을 보고 서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한참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그를 그리워했다. 고작 여기까지 달리려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온 모습이 퍽 한심했다. 그를 보기 전에 중요한 미팅 하나가 있었고, 고객에게도 그에게도 술냄새를 풍길 수 없었다. 하여, 집 앞 강변에서 그가 출근할 사무실까지 거리를 왕복해서 달렸다. 그의 사무실까지는 단숨에 달렸지만, 집 앞으로 갈 때는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무거웠다. 진정으로, 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왕복해서 뛰는 모습이 마치 내 마음 같았다. 그에게 가고 싶어 달려가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 쳇바퀴 돌 듯 한없이 도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리움과 술기운이 만나 극에 달한 감정의 폭발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터져버린 감정과 눈물을 가다듬지 않고, 달렸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러너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마지막으로 그의 사무실 앞에 다시 멈춰 섰다.
'기다려요, 곧 갈게요'
전쟁과도 바쁜 오전 스케줄이 끝났다.
또 늦었다. 매번 서두르면 늦고 마는 이 죽일 놈의 징크스.
택시 안에 실린 내 몸은 흔들리고 흔들거리며 섰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사무실을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택시비를 결제하기 전부터 내 눈은 빠르게 그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봤던 그의 모습은 상상으로 만나야 했다.
'바쁘시겠지...'
늦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두 발은 물에 빠진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이래서 마음이 깊어지면 도리어 내 쪽이 상처가 되는 것을 불 보듯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그러나 그 한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반가움을 표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내게 말을 걸었다.
"계단 타고 오셨어요? 편집 하나가 늦게 마쳐서...."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내 마음에는 갑자기 봄이 찾아와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던 그는 나를 마중 나가기 위함이었다. 굳이 그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그가 어디 다른 용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김 빠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정하게도 내게 알려주었다.
"잘 지내셨어요?"
많은 밤을 되새기며 귀에 맴돌던 식상하고 올드한 인사말이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그의 목소리는 청포도 사탕만큼 달달했고, 감미로웠다. 공중에 그의 음성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용기만 있다면 그의 입을 막아 목소리를 내 입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한 용기는 내게 없었다. 그에게 등을 보고 서야 하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마주 보고 섰다. 민망했다. 그렇지만 원래 의도한 것처럼 뻔뻔하게 굴었다. 마주한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해버리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죽을 만큼 보고 싶었어요'
꾸준히 잘생겼고, 한결같이 멋있는 어른 남자였다.
수많은 날들을 그리워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그에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 없이도 잘 지내는 듯한 모습에 퍽 서운했다. 그럼에도 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등 뒤에 있어야 할 그가 내 앞에 있으니 묘한 충동이 생겼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본래의 그의 모습이 움직이는 변화를 혀끝으로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는 나의 유일한 뮤즈였으니..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그간 있었던 그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마구마구 막막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웃을 때만 보이는 끝없이 아래로 처지는 눈매는 나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 위력이 있었다.
"달릴 때 막 고함지르면서 뛰지 않아요?"
"아니에요.. ㅠㅠ 저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ㅠㅠ"
그가 말갛게 웃었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낸 그에게 볼멘스러워야 하지만, 그 앞에선 영락없이 속수무책이었다. 티 없이 말갛게 웃는 입모양을 가린 마스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더불어 마스크를 벗지 않은 그가 일순간에 미워졌다.
'다정하려면 다정만 하시지...'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격이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분명. 미운 마음 하나가 살랑 불더니 그 미운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금세 부풀어졌다. 베베 꼬인 심성이 수면 위로 올라와버린 것이었다. 내 마음을 알지 못했던 그는 그의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지내는 것을 상상만으로 질투가 나는 바람에, 콧김만 씩씩 내뿜으며 잠을 설치곤 하는데 말이다. 배알이 꼴려서 배가 아프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나와 못 이룬 꿈을 다른 이와 해냈다는 걸 알면서도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내 처지가 가슴이 저릿한 것이었다. 그런 못난 마음은 그에게만큼은 절대 들켜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숨기지 않아도 그와 마주치는 눈 맞춤의 횟수가 비례될수록, 그가 눈매를 떨어뜨리며 웃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미운 마음은 저만치 멀어짐을 느꼈다.
내 마음의 주인은 그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익숙할 법도한 그의 손길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죽어있던 몸의 감각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 그를 반겼다. 청바지 지퍼를 여는 손길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청바지의 좁은 틈 사이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오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엉덩이를 들어 청바지를 벗겨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내 손이 기억하는 그의 부드러운 상의 속 부드러운 촉감이 떠오르자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위험한 중독이 시작되었다. 보드라운 상체를 가린 거추장스러운 옷을 죄다 벗겨버리고 입술의 감각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역시나 그가 보는 내가 혹시나 무례할까 봐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는 반응했고 그의 눈도 지그시 감기고 있었다. 나만큼 뜨거웠고 젖어있는 그를 손아귀에 쥐었을 때 그의 입에서 뜨겁고 낮은 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유일하게 내가 그를 망가뜨리고 일그러뜨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올바른 사람을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그 못된 심보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으나 묘하게 흥분되었다.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더 깊숙한 늪으로 빠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보드라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마스크를 접는 그의 다정한 행동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내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었다. 도무지 나는 어른 남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을 운명이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에 걷잡을 수 없이 파장을 일으키는 내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내 몸의 주인도 그였으므로..
당장이라도 그를 내쪽으로 끌어오고 싶은 것을 겨우, 겨우 참아내야만 했다. 그의 손이 아닌 그의 마음이 내게 와닿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나를 그가 알까. 다정하고도 따뜻한 그의 눈빛이 내게는 뾰족한 날을 세우고 날 아프게 했다. 그에게 질척거리는 나와 같이 그도 내게 미끌거리며 질척거리고 있었다. 그라도 내게 질척거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입안으로 끌어왔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내 마음과 그의 몸이 질척거림은 멈추질 않았고 묘하게 서로 뒤엉켜 부둥켜안고 있었다. 나와 그는 죄다 틀린 것만 서로 얽히고 있었다. 그의 아래에서 헐떡이는 것만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올려다본 그의 눈은 한결같이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 왜인지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짝사랑의 비애인 듯싶다.
"넣고 싶어요"
'날 사랑하세요'
버젓이 등을 보여 엎드렸다. 깊숙이 들어오길 바랐으니까. 청바지를 벗기는 그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워 마음이 흔들렸다. 착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같은 죄책감 같은 마음이었다. 부풀어진 그가 들어왔고, 숨구멍이 막힌 듯 호흡이 멈췄다. 아팠다. 발을 들일 땐 원래 다 이런 건가.. 부드러운 그의 손과 대조적이게 그는 몹시도 부드럽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여 배려했지만, 닿는 부위는 다정하지 못했다. 단순히 피스톤질과 쾌락의 환희가 아니었다. 자손 번식 또한 분명 아니었다. 끈끈해지는 정서적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좋았고, 몸이 맞닿으면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온기가 좋았다. 긴장감과 떨림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가 날 안고 있는 그 순간에 모든 세상이 멈춘 듯 잔잔하고 조용해진다. 가면이나 치장하지 않은 온전한 나를 그가 있는 그대로 보듬어준다는 묘한 성취감은 실로 중독적이다. 그의 품에 있다는 건, 내게는 욕망이면서 그에게 연결되기 때문이고, 미친 몰입의 시간 그 이상이다.
"아파?"
그의 숨결이 내 피부에 닿았고, 조곤조곤한 어투의 따뜻한 음성 하나가 나를 더한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도리도리"
'내게 오래 머물러줘요'
그가 볼 수 있게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부드럽고 천천히 움직였다.
'세게 해 줘요'
더 깊숙하게 그가 들어오길 바랐으나,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아까보다는 더 가까이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고 내게 물었다.
"쌀 거 같아. 어디다 해?"
"입에"
대답을 듣고 그는 내게서 빠져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동선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나는 그의 다리 사이로 찾아들었고, 그는 단번에 겨울을 준비했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 사계절 모두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이거 계속 겨울을 몸속에 품고 다녀도 괜찮은가요?
죽는 건 아니겠죠?'
몹시도 궁금했지만, 깜빡하고 물어보질 못했다.
그의 겨울을 입속에 가득 담아 내 몸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서야 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내게 그는 또 배려를 했다. 말갛게 웃는 듯 보였지만 아까와는 다른 눈빛을 하고선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 눈빛은 연민이었고, 그 행동은 동정이었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 봄이었다가 여름이 들이닥쳐 뜨겁게 욕망하고, 짝사랑의 쓸쓸한 가을을 만끽하고 마침내 함박눈이 내린 겨울이 되었다. 그렇게 사계절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다시 봄이었다.
"밥 같이 먹을래요?"
자존심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서 동정과 연민을 받고서도 그의 한마디에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대는 꼴이라니... 한심해.
그렇게 시린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다정하게도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나는 꽃잎보다 더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애틋하지만 그 간절함이 그에게 닿지 못했고, 닿았다 한들 져버릴 봄이었다. 수도 없이 봄과 겨울까지의 계절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오가며 식었다 뜨거웠다를 반복해야 끝이 날까. 처절하게 그에게 도망치고자 내달린 발걸음 여전히 제자리에서 쳇바퀴 돌고 있는, 나는 그의 햄스터였다.
"편집장님, 햄스터 한 마리 키우지 않을래요?"
'날 데려가주세요. 밥도 조금 먹고, 고분고분 상냥하게 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