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2-9 기다림2

호호아줌마v 2025. 5. 23. 10:24


#비가 나린다

버스에서 하차했다.
아주 가늘게 내려 이슬비 같기도 하고, 가랑비 같기도,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 같기도 하다. 비는 빗방울의 굵기를 보고 그 이름을 달리 붙이는 것조차 몹시도 마음에 든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감정을 조절 못하는 것처럼 조금 내리기도, 마구 쏟아지기도, 다시 그치기도, 또 굵고 거세게 내리다가도 또다시 주춤하기도... 나는 비가 정말로 좋다. 살아 숨 쉬는 계절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비가 몹시도 좋다.
이슬비는 숨소리보다 조용히 내게 내렸다. 보드라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가랑비에 마음이 일렁였다. 걸을수록 더욱 진해지는  흙냄새와 풀냄새는 마음을 간지럽혔으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보슬보슬 비 양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좋았다.
사무실 사람들이 보았으면 다들 내게 한 마디 했을 테지..

"비 중독자 중증환자"

비가 들어가서 인지 나는 사무살에서 저렇게 불리는 것도 몹시나 마음에 든다. 곧장 집으로 가기 싫었다. 비를 더 맞고 싶었으니까. 조용히 내게 내리는 빗속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얘들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비를 맞고 다리를 건너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너무 놀랬다. 이어폰을 한터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가씨, 어디까지 가요? 같이 써요"
"아.. 아닙니다. 저는 이미 다 젖었고, 비 맞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엄마보다 조금 연세가 있으신 분이 우산을 기울여 내게 같이 쓰자고 제안을 하셨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마음에 걸렸지만, 바로 잡지는 않았다. 대화를 더 이어간다면 비를 맞는 내 시간이 단축되었으므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옆에 누군가 있는 게 느껴졌다.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같은 방향인 거 같은데 같이 쓰고 갑시다"

아파트에서 자주 뵈었던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오며 가며 공원이든 마트에서든 보았던...

"아, 아니에요! 우산 사서 써도 되는데, 비가 맞고 싶어서요"
"그러다 감기 걸립니다"
"^^ 쓰고 가세요. 전 비 좀 맞고 걷고 싶어요"
"그럼 진짜 갑니다??"
"네, 가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보고는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점점 비 맞을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갔고, 신경질이 났다.

'비 맞고 가는 게 뭐가 어때서.....'

다시 걸었다. 금세 내 기분은 좋아졌다. 비가 계속해서 보슬보슬 내리디가 조금은 굵어지는 듯했으니까.

"빵! 빵!"

누군가 클락션을 울렸고, 그 주인은 아기 아빠였다. 썅.

"내가 우산 챙겨가라고 했죠?"
"안녕하세요"

그는 자기 말이 맞다는 특유의 당당함으로 내게 말했다.

"타요"
"싫어요!!!!"
"네?"
"싫다고요. 비 맞고 갈 거예요"
"영어 학원 차 지나갔는데 못 봤어요?"
"진짜요??!!"
"빨리 타요"
"저 조금 젖었는데?"
"괜찮아요"

빗속을 걷는 게 너무도 좋지만, 빗 속에 아이를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어? 학원차 아니었네"
"이 씨...."
"네??^^"
"아니에요"
"왜 이렇게 성질이 나셨어요 ㅋㅋㅋㅋㅋㅋ"

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는 특유의 감정과 음성이.

'나이도 조그마한 게....'

"오랜만에 비 좀 맞겠다는 데 자꾸 방해해서요"
"그게 접니까ㅋㅋㅋㅋ"
"뭐.... 아니라고 할 순 없죠"

뭐가 그리 즐거운 거야. 남의 불행이 행복한 사람인 걸까.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 못 본 건가... 사람을 많이 봐서 대충 얼굴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안다. 지금의 얼굴은 그동안의 어떤 표정을 많이 짓고 살았는지 보여주는 결과물이니까. 그는 엽기토끼 캐릭터처럼 눈꼬리가 길고 쳐져있고, 입꼬리는 웃지 않아도 살짝 올라가 있다. 그동안 많이 웃으며 살았다는 반증인 셈이었다. 순하고 착하게 생긴 사람, 법 없이 살아도 될 만큼 순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행동과 표정이 여유가 있었고, 느긋한 편이었다. 남편도 공감했으니까. 유전자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 그의 아들은 그 사람을 닮아 순하고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로 그는 해가 될 사람은 아닌 것이다.
비 맞을 시간을 뺏은 건 사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금은 안면이 있는 편한 사람에게 그 화살이 날아가버렸다. 미안했다. 어른스럽지 못했다.

"오늘.. ** 아버님 덕분에 지각도 면하고, 하원 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감사합니다"
"^^"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아참, 저 우산 챙겨 올게요"
"네, 차 오면 얘들 제가 받을게요"
"네"

빠르게 우산 3개를 챙겨갔고, 1층에 도착했을 땐 아직 아무도 하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걸어왔어요?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아뇨. 일부러 비 맞고 싶어서 몇 정류장 앞에서 내렸어요"
"아.. 비 많이 오면 어쩌려고요. 옷도 흰옷 입으셨는데..."
"괜찮아요. 빨면 되니까요"

항상 그렇듯 첫째 아이 학원차가 먼저 도착했다. 내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피아노 학원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는 곧장 뛰어 아까 그 장소에 도착했다. 그의 품에는 그의 둘째가 안겨있었다.

"인사해야지~"
"아줌마 안녕하세요"
"어~ 안녕^^ 오늘도 재미있었어??"
"응 오늘 뮤지컬 봐떠!!!"
"우와 재미있었겠네^^"

우리 둘째 유치원 차가 도착했고, 눈을 비비며 내게 쪼르르 안겼다. 조금 따뜻한 아이 몸이 차에서 잔 듯했고, 내 아이에게서 선생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많이 울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해서, 더욱 진하게 둘째를 품에 안아 많이 울었을
아이를 위로해 주었다.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
"엄마도 우리 **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도 씩씩하게 잘 다녀왔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칭찬 스티커 붙이러 가자!"
"어부바해 줘"
"비 와서 우산 써야 하는데?"
"어부바해줘ㅜㅜ"

낮잠을 자던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나서 낮잠을 자지 않아 이쯤에는 짜증을 많이 내고 떼를 쓴다..

"그래, 업혀. 대신에 비는 맞고 가야 해. 참을 수 있지?"
"웅!!!!!!"

우산 두 개를 들고 아이를 업었다. 불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그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힘든데 넌 이제 기분이 좋구나??^^"
"아저씨 빠빠이~~~~"

등뒤에선 아이의 꺄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앗! 차가워'라는 소리도 연신 들렸다. 기분 좋은 소리였다.

남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듯했다.
남편보다 더 자주 보는 듯했다.
아침에 그와 그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지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