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93 한때가 그때

#영원한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휴대폰 알람 소리가 고요한 침실에서 울렸다.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고, 재빠르게 정지 버튼을 눌러 알람 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침대를 빠져나왔다. 화한 치약이 상쾌한 아침을 더 부추겼다. 오랜만에 달릴 생각에 달리기도 전에 행복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거울 속 비친 얼굴에 토너를 발랐다.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고 달리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계절은 봄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새벽 기온은 서늘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볼륨을 높였다. 장덕의 '님 떠난 후' 노래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달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잠을 포기하고 나왔던 것이었다, 분명 그랬었다. 그러나 내 두 발은 목적지가 있었던 듯, 단숨에 그의 사무실이 보이는 강변 앞에 멈췄다. 단숨에 달려왔지만,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춰서 깜깜한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후면 그가 머물고 있을 건물이 한순간에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를 떠올리자 인도에 서성 거리며 날 기다리던 어른 남자가 생각나버렸다. 분명, 그때 그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입꼬리가 반달을 그리고 곧 웃음이 나왔다.
보고 싶다. 그러나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치.. 내게만 마중과 배웅을 해주는 건 아닐 거야.'
볼 수 없는 그 사람을 떨쳐버리기 위해 괜히 트집을 잡아 미워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그가 그리워질 뿐이었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볼륨을 높였지만,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그의 빤하고 지루한 인사말이 맴돌아 노래처럼 두 귀에 흘러들어왔다. 우주 속에 홀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연해진 두 발은 달리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려는 나를 나는 기어코 달리도록 몰아세웠다. 그럴수록 그와의 모든 시간들이 선명했다. 날씨와 계절, 기온까지 그 모든 장면들이 해상도 높여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그를 마주한 순간의 빛을 영영 놓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달릴수록 외롭고 긴 구름들이 지났고, 봄이었으나 바람은 적당히 식은 보리차의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만, 그의 미지근한 온기가 떠올라 버렸다. 무성히 자라난 풀들 끝자락에는 이름 모를 흔해빠진 들꽃들이 바람에 나부대며 피어있었다. 그만, 한껏 휘어진 그의 웃는 눈꼬리가 떠올라 버렸다. '괜찮아'라는 말을 혼자 되뇌어 보지만, 괜찮지 않았다. 내 마음의 진동은 크게 요동쳤고, 그 마음을 가두기에는 너무 컸다. 돌아가야 했다.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나를 돌려보내야 했다. 오늘 해야 할 내 일상을 애써 떠올려 그를 밀어냈다. 기쁠 때는 기쁨만을 어른 남자에게 전해주고 싶고, 슬플 때는 슬픔만은 그에게 숨기고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지런했던 내 새벽이 이제 숨을 거두었다. 더 이상 가지런 새벽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다만, 지워지지 않는 슬픔들이 한데 모여 여전히 난 그를 기다린다. 햇살처럼 눈부신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행복했던 추억들이 남아 내 곁에 남아있다.
또다시 그의 사무실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여전히 불은 켜지지 않았고, 어두운 사무실만큼 나도 한순간에 어두운 슬픔이 몰아 쳤다.
한 때 내 전부였던 사람을, 함께했던 기억을 나눠가진 사람을, 그때에 머물고 살고 싶은 나를 모두 져버리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인간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사람을 등지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를 등지고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돌아보면 계속 그 자리일 뿐.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했는데. 타오르다가도 다시 꺼져버리고, 꺼졌다가도 쉽사리 활활 타오르는 마음이 진정되기는 하는 걸까. 마르고 메말라버리고 그리움이 닳고 닳아 결국 마음이 죽어야만 끝이 날까 봐, 그 끝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을 내가 괜찮지 않을까 봐, 남은 인생을 허무와 공허를 끌어안고 살아내야 할 내가 가여워 오늘도 나는 그를 밀어내고 다른 누군가를 앉히려 한다.
영원은 어디에도 없다. 영원한 사랑은 더욱 그렇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사랑은 본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랑에 목을 매고 있는 꼴이라니 한심하다며 나를 몰아세우지만, 그래도 또다시 사랑임을 확인한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랑을 가지려고 안달이다. 물질문명은 소유함에 근거한다. 세상 만물은 신이 만들었지만, 그 소유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다. 주인 없는 물건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소유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어렵지 않다. 값을 매기고 필요하면 제 값을 주고 사면 그만인 것이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은 어렵다. 흥정 따위 통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도 없다. 나는 그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닌가..? 소유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단념했다는 표현이, 그게 조금 더 솔직한 편이겠다. 그를 소유해서 단순히 소유욕만을 채우고 싶은 건 아니다. 훗날 오늘을 '한때'라고 불릴 지금을, 그도 내게 머물렀다고 기억하고 싶다. 해서,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이뤄질 수 없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 혼자만의 슬픈 '한때'가 아니라, 그도 함께 슬픈 인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속수무책으로 사랑했고, 처절하게 슬퍼했다고.. 사랑이었으나 사랑은 하지 않아 애틋했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게 오지 않을 것이 너무도 확연하기에, 이뤄질 수 없는 운명에 그도 괴로웠을 지금을 훗날 기억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날 사랑해야 한다. 그 말이 그 말인 거겠지만.... 말이다. 자꾸만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고 있는 내가 한심 없기 그지없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누군가 가격만 정해준다면, 그래서 그를 살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그를 사고 싶다. 돈을 주고서라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두말없이 돈을 내어줄 것이다. 그것도 안된다면, 정실부인이 아니어도 첩이라도 남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안된다면, 석유의 나라 사우디로 당장 그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가고 싶다. 현재 현존하는 여자를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곳이자 사랑을 돈을 주고 가질 수 있는 곳이니까.
당신은 무조건 행복해야만 한다. 불행해 보일 시에는 당신을 내게 데려올 온갖 방법을 총 동원할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반드시, 기필코, 기어코 행복할 수밖에 없어야만 해. 그래야만 해. 당신은 행복해야 해. 불행한 것은 내가 할 테니, 당신은 그저 행복만 해.. 기억해야 해. 누군가 당신을 기어코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하지 말고 여지없이 나를 떠올려...
말도 안 되는 사랑이라도 아무리 애를 써도 막을 수 없다면, 그 사랑도 피할 수 없다면 그건 운명이다.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길 바란다.

#무릇 사랑은 슬퍼야지요
보고 싶다고 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으면 해요.. 나는 당신이 이리도 그리워 온통 외로움, 고독, 상실, 망실 같은 것들을 죄다 끌어안고 슬픔에 절여지고 있어요. 당신에게 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 한 번도 부리적 없는데, 왜 내게만 이리도 가혹한 걸까요. 내 사랑을 받고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당신을 보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행복인데, 그저 그것뿐인데. 뭐 때문에 이리도 불리하게 나만 독박을 쓰는 건가요. 콕 집어, 당신이 내게 오지 말라 한적 없지만, 그렇다고 당신에게 가겠다고 떼쓰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지도 않았잖아요. 나만 사랑해 달라고 투정 부리지 않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며 당신을 잡아두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왜 당신은 내게 가혹하신 건데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슬픔만 느끼게 하시나요.
당신은 보태지 않아도 되는데.. 기어이 내 슬픔에 또 다른 슬픔을 실어주네요.
그렇다고 죄다 슬픔만을 주는 건 또 아녜요. 당신을 만나 나도 덩달아 꽃이 되어 피어났으니까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일 테니까요.
내 모든 사랑을 당신에게 전달하기 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단어들을 모아 서툰 고백을 꾹꾹 눌러 당신을 위한 문장을 만들곤 해요. 부치지 못할 편지들과 고백들이 결국 새드엔딩 소설이 되어버리곤 하지만요...
당신을 보러 가야겠어요. 여기까지가 당신을 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치인가 봐요. 그만 슬퍼하고, 그만 울고 싶어요.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거든, 모른 척하세요.
당신은 가만히 계셔요. 내가 당신에게 갈 테니까요. 그동안 내게 슬픔이라는 벌을 줬으니 이제... 당신 보러 갈 자격 생긴 거잖아요. 그렇죠?^^
잘 자고, 잘 자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ps. 당신은 영원한 내 뮤즈예요. 내 손끝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