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2-5 가깝지만 먼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 이유는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무슨 이유인지 비는 나에게 선물 같은 느낌으로 언제나 반갑다. 살며시 내리는 봄비를 정중히 맞이하며 아침을 준비하는 나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비로 인해 나의 아침이 여유롭고 행복했다. 등교준비를 위해 깨우는 소리, 식사 준비를 위한 달그락 소리를 내는 식기, 양치하는 소리, 아침을 준비하는 바쁜 소리와 비 내리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행복했다. 아마 출근을 하지 못해 더욱 여유로워진 시간 덕분이겠지만 말이다.
새로 장만한 장화에 밝은 색상의 우비를 입고, 우산은 스파이더맨으로 선택한 첫째 아이는 나를 닮아 비를 좋아한다. 현관 앞에서부터 잔뜩 행복을 담고 있는 얼굴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발가락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힙시트로 아이를 업고 그 위에 남편 우비를 입었다. 장화를 신고, 내가 좋아하는 땡땡이 우산을 챙겼다.
"엄마, 비가 많이 왔나 봐요!!!^^"
아이의 들뜬 목소리에 나도 한껏 부풀어졌다. 이번에는 10분을 일찍 나섰다. 비 웅덩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나와 아이 덕분이다.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물웅덩이를 첨벙첨벙하며 물을 튀기는 첫째와 나. 등에 업힌 둘째는 발을 구르며 까르르 웃고, 빗소리는 우산에 툭툭 떨어지고, 축축함과 습한 그 사이에 있는 비의 촉촉함 마저 모두 완벽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잔뜩 웃음 머금고 우리를 쳐다봤지만, 그 눈빛마저 좋았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행복해보이네"
사실 맞는 말이다. 아이보다 내가 더 행복해보였을테지. 어르신의 뼈 때리는 한마디에 마냥 웃음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등굣길에 물 웅덩이란 웅덩이는 죄다 첨벙거렸고, 쉼 없이 까르르 웃는 소리와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30분 더 일찍 나올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야"
아기 아빠의 아들이 뒤에서 첫째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뒤돌아보았고, 그렇게 인사를 나눴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비 오잖아요^^"
연한 청바지에 밝은 색 체크 난방을 입은 그는 검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저 아기 아빠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섯 명이 나란히 걸었다. 인사를 하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지만, 물웅덩이를 보면 나와 첫째는 손을 잡고 웅덩이로 달려들었고 그렇게 즐거운 등굣길은 계속되었다. 그의 아들도 첨벙 거리는 놀이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엄마들은 이런 아이들의 부러워하는 눈치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아줌마 손 잡고 같이 해볼래?"
"네!!!^^"
장화를 신었지만, 비 놀이에 소극적인 그의 아들은 내 손을 잡고 몇 번 시도 끝에 재미를 느낀 듯했다. 그의 아들도 즐거운 듯 환한 미소와 웃음소리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 앞 횡단보도까지 물 웅덩이를 참방거렸다.
"다음에도 아줌마랑 할래요!"
"우리 엄마랑 비 오는 날에 비 맞으면서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데 진짜 짱 재미있어!!!!"
첫째는 자랑하듯 말했고, 그의 아들은 시무룩했다.
"여름에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아줌마랑 같이 놀자"
"네!!!! 꼭이요"
그렇게 약속을 하고 교문을 들어서는 두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교문 앞에 서성거렸다.
"이제 아저씨한테 갈래"
"아저씨한테 올 거야??"
"젤리 사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래^^ 맞아. 이리 와. 엄마 힘드시겠다"
"아니에요. 제가 업고 갈게요"
"아저씨한테 갈래 내릴래ㅠㅠ"
"괜찮아요. 제가 안을게요"
나는 미안한 표정을 하고서 우비를 벗어 그가 아이를 힙시트에서 빼낼 수 있게 등을 돌려주었다.
"으챠. 밥 많이 먹었나 보네? 더 묵직해졌어^^"
"스파이더맨이 되려면 밥 많이 먹어야 한댔어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가는 그에게 마냥 미안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제가 우산 들게요. 주세요"
그는 내게 우산을 기울였고, 내가 쓰고 있던 땡땡이 우산을 접고 그의 우산을 잡았다. 같이 나란히 쓰는 건 불편한 일이므로 우산을 같이 쓰지 않는 대신 우비의 모자를 썼다.
"어른이 우비 입은 모습은 처음 봐요^^"
"이상한가요??"
"아뇨 아뇨!!"
"남편도 싫어하더라고요.. 남편이랑 같이 다닐 땐 우비랑 장화는 금지라네요^^;;"
"귀여우세요^^"
"나잇값 못한다는 말을 돌려 말하시는 거죠??^^"
"아니에요 진짜예요. 잘 어울리세요. 비 맞지 말고 들어와요"
"비 맞고 싶어서요. 우비 입고 비를 맞으면 빗소리가 더 잘 들리거든요"
"비 좋아하세요?"
"네~^^ 너~~~ 무너무요*^^*"
"^^"
비를 좋아하냐고 묻는 그의 말에 너무도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고야 말았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이었으므로. 나는 비를 정말로 좋아하니까.
비를 좋아한다는 대답을 듣고서 그는 싱긋 웃고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빗소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단순히 할 말이 없는 탓이었을까. 그게 어느 쪽이든 비의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만으로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우산은 무척이나 무거웠고 그의 키에 맞춰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들기에는 우산을 자기가 들겠다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온 힘을 짜냈다. 그런 나를 둘째가 살려주었다. 편의점을 보고는 젤리 사러 가자는 아이 말에 그는 남자 대 남자로 약속했으니 사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비를 입은 터라 같이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 손에는 하리보와 사탕이 쥐어져 있었고, 아이 얼굴에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리보가 뭐라고 저래 행복할까.. ㅎ
"이제 제가 안을게요"
"싫어!!!"
"왜에~~~ 엄마가 안아주는 게 싫은 거야??"
"젤리 다 먹고 엄마한테 갈게"
"아저씨 힘들어"
"괜찮아요. 가요"
나는 그의 우산을 펼쳐 반대 손으로 우산을 들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우산을 달라고 했다.
"우산이 무겁죠?"
"아니에요. 제가 왼손잡이라 왼손이 더 편해요"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아니에요! 둘째가 통통해서 우산까지 들면 힘들어요"
"나 안 뚱뚱해!!!!!!"
"ㅋㅋㅋㅋㅋㅋ맞아. 너, 안 뚱뚱해. 통통하고 귀엽다는 소리를 엄마가 하신 거야^^"
"안 떨어지게 아저씨한테 잘 붙어있어야 해. 할 수 있지??!!"
"끄덕끄덕"
우산까지 들게 한 나는 그의 옆을 풀 죽은 듯 나란히 걸었다. 우산이 컸지만 우산 속으로 들어가기 불편했고, 우산 밖을 혼자 걷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의 옆에서 완전히 나와버렸고, 기분 좋은 빗소리는 더 진하게 들렸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비가 그렇게 좋아요?^^"
"네^^"
"낭만 있는 분이셨네요^^"
"어??!! 저 '낭만'이라는 말도 되게 좋아해요. 요새 잘 안 쓰잖아요. 글자모양도 예쁘고, 말할 때 혓바닥이 살짝 치아 사이에 물려, 마치 웃는 것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잖아요"
"낭. 만. 낭. 만. 진짜 그러네요?"
"예쁜 말이에요, 낭만은."
간식거리는 엄마 외엔 잘 나눠주지 않는다. 그게 아빠라도.... 그러나 사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인지 그의 입속에 하리보를 넣어주었다.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초록색 하리보는 좋아하지 않는 맛이라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어 준 것임을.. ㅋㅋㅋㅋ
우비를 입었지만 비를 맞은 탓에 아이를 안기에 불편했고, 해서 그는 집 앞까지 가자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이가 버튼 눌렀고 나는 문이 닫히기 전, 숨을 한껏 참았다.
"매번 신세를 지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들어가 보세요"
"아! 잠시만요!"
우비를 벗어 두고 황급히 마시는 액상 비타민을 그에게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쉬세요"
그는 짧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나도 그를 따라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에게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아저씨 잘 가~~~~~~ 빠빠이"
그가 뒤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미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연한 청바지 끝자락이 제법 젖어있었고, 긴 난방 소매와 팔이 너무도 많이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과한 친절은 부담이다. 과한 배려 또한 부담스럽다.